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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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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작은 속도의 헌신이 필요하다 크리스천헤럴드2025.09.15
    “당신은 피스메이커Peace Maker가 되세요. 나는 페이스메이커 Pace Maker가 되겠습니다.”지난 8월 25일, 한국의 이재명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한 말이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한반도 평화를 위한 중재자 역할에 기대를 걸며, 이 대통령 자신은 그 평화의 여정을 지원하고 뒷받침하겠다는 다짐을 전한 것이다. 이 말은 단순한 외교 수사가 아니다. 속도와 방향, 주도권과 협력의 의미가 담긴 발언이다.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마 5:9). 곧 피스메이커가 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긴다. 페이스메이커는 예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인가.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렇게 질문을 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는 세상 속에서 피스메이커인가, 아니면 페이스메이커인가. 또는 이런 것들과 관계없이 교회는 누군가의 속도를 조율하며 함께 걷는 동반자였는가. 아니면 여전히 자기 나름의 속도로 앞서가기만을 원하는가. 마라톤 경기에서 페이스메이커는 결승선을 통과하지 않는다. 대신 다른 선수들이 끝까지 완주할 수 있도록 처음부터 일정한 속도로 끌고 가주는 역할을 한다. 중심이 되기보다, 흐름을 만들어주는 조력자다. 그런면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한 말의 의미는, 앞에서 중재하는 역할은 당신이 하되, 나는 그 길이 끝까지 가도록 돕겠다는 것이며, 협력과 조율, 그리고 겸손한 헌신이 담긴 말이라고 해석이 된다.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피스메이커의 복은 ‘순간적 화해’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평화’이다. 그런데 그 평화가 유지되려면 반드시 누군가의 뒷받침이 필요하다. 피스메이커가 평화를 세운다면, 페이스메이커는 그 평화를 끝까지 지켜내는 힘이 된다.우리는 자주 묻는다. 왜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가. 그러나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교회는 지금 누구의 속도에 맞춰 걷고 있는가.현대 사회는 점점 더 복잡하고 다양해지며,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의 언어는 여전히 교회 중심적이다. 예배와 선교, 헌신과 봉사의 언어는 있지만,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이들의 언어, 상처받은 이들의 시간, 교회를 처음 찾는 이들의 ‘속도’는 고려되지 않는다.소통은 말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속도를 맞추는 것이 소통의 시작이다.지쳐 있는 성도를 위해 교회의 속도를 늦추는 용기, 질문이 많은 청년을 위해 설명을 생략하지 않는 인내, 낯선 이웃을 위해 형식을 깨는 유연함. 이러한 태도가 오늘날 교회가 회복해야 할 ‘페이스메이커’의 정신이다.누군가의 곁을 지키며, 그 사람이 포기하지 않도록 돕는 사람. 묻고, 기다리고, 다시 말해주는 사람.넘어진 이에게 정죄보다 손을 내미는 사람. 그들이 바로 교회의 ‘페이스메이커’다. 많이 말하지 않지만, 누군가를 살리는 이들이다. 앞서가지 않지만, 공동체가 끝까지 완주할 수 있도록 만드는 힘이다. 그리고 바로 그들이야말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피스메이커의 사역을 가능하게 하는 숨은 동력이다.교회가 진정한 소통을 원한다면, 더 많이 들어야 한다. 더 많이 기다려야 하며, 더 많이 맞춰야 한다.이 시대가 교회에 묻고 있는 것은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느냐”보다 “당신이 얼마나 함께 걷고 있느냐”는 질문일지도 모른다.교회는 세상 속에서 피스메이커로 불려야 한다. 동시에 교회 안에서는 서로에게 페이스메이커가 되어야 한다. 피스메이커가 방향을 제시한다면, 페이스메이커는 그 길을 지속하게 만든다.예수께서 말씀하신 화평케 하는 자의 복은 오늘 우리 시대에 이렇게 확장될 수 있다.“화평을 만드는 자는 복이 있다. 그리고 그 평화를 끝까지 지켜내는 자 또한 복이 있다.”이 땅의 수많은 신앙의 경주자들이 포기하지 않도록, 우리 교회가 그 옆에서 속도를 맞춰 함께 걸어갈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산상수훈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깊은 소통의 메시지일 것이다.질문으로 남긴다:당신은 지금, 누군가의 곁을 지키며 걷고 있는가. 당신의 공동체는, 어떤 속도로 이웃과 함께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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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6
    [오피니언] 황순원의 10가지 감사노트 - 내 짐을 주께 맡기며 오늘을 시작합니다 크리스천헤럴드2025.09.15
    1 오늘 첫 시간에 말씀해 오시는 주님은 “네 짐을 내게 맡기렴 내가 대신 져 줄 테니 “라고 하십니다. 그동안 무겁게 느껴졌던 짐들을 마음 놓고 맡길 수 있어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며 감사를 드립니다.2 누군가에게 맡길 수 있으려면 그를 온전히 신뢰해야 합니다. 수없이 맡겼다고 하면서도 염려는 그대로 하는 것은 아직 머리로만 맡길 뿐 실제로는 맡기지 않은 것입니다. 맡길 수 없는 것은 온전한 신뢰가 없기 때문임을 알고 솔직히 고백할 수 있어서 감사를 드립니다.3 육신의 몸이 약해질 때마다 아무 희망이 없어 보이곤 합니다 그러나 내가 힘이 없어 쓰러져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쉬지 않고 일하시는 것이 눈앞에 보일 때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증거 할 수 있어 감사를 드립니다.4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6,7) 이 말씀은 바울이 옥에 갇혀 있을 때 빌립보 성도들에게 강조한 명령입니다. 이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 마음속에다 감사의 앱을 설치하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감사가 튀어나오게 할 것을 다짐하며 감사를 드립니다.5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후로는 사람의 말이 하나님귀에 들리는 대로 재창조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가시는데 우리의 말대로 하시겠다는 엄청난 권세를 부여해 주신 약속이기에 오늘도 믿음으로 선포하며 감사를 드립니다.6 세계로 흩어져서 사역하던 선교사님들이 병으로 혹은 코로나로 갑자기 사별의 슬픔을 안고도 남편을 묻은 그 땅에서 사역하다 지친 홀로 된 사역자들을 위해 홀사모 센터를 수년동안 기도하여 왔습니다. 때가 되매 현실적으로 실행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눈에 보이기 시작 하자 새 힘이 솟아나기 시작하면서 창조의 하나님을 향하여 선포하게 하며 감사를 드립니다.7 평생 동안 해온 기도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방법으로 이루어질 때마다 원망과 불평을 쉴 새 없이 해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보니 하나님을 향해 수없이 질문해 온 것들이 나를 성숙시켜 준 것임을 알았을 때 성숙의 재료는 예상한 것과 반대됨을 알고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8 지난날들 동안 겪었던 고통과 시련이 클수록 그 기억은 더 깊고 더 빛납니다. 불같은 시련이 지나간 자리에는 불평대신 감사가, 공허대신 만족이, 절망대신 희망이 남은 채 또 다른 깊은 세계로 인도해 주시기에 감사를 드립니다9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절실함과 책임감 그리고 사명감이 어떤 방해물 앞에서도 포기할 수 없었기에 하나님도 결코 포기할 수 없어 지금도 앞으로도 쉬지 않고 일하실 것을 확신하며 감사를 드립니다10 오늘도 섬길 수 있는 수많은 사모님들이 나의 기쁨의 활력소가 되어 줄 뿐 아니라 말랐던 에너지를 품어내 주는 마중물 같은 분들임을 알고 이 모든 것이 나의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할 수 있어서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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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5
    [오피니언] 조영석 목사의 생각하며 기도하며 - "종"에서 "아들"로 크리스천헤럴드2025.09.15
    대학생 때였다. 삶의 의미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을 할 때였다. 내가 사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할 때였다. 비록 교회를 다니고 있었지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이었다.하나님을 믿었지만 나와는 상관이 없는 분이었다. 그 이유가 인간의 삶의 목적에 대해 하신 말씀 때문이었다.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를 이사야서 43:21 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함이니라.” 믿음이 어릴 때 읽는 이 성경 구절은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전지전능한 신을 숭배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와 같은 기능적 피조물에 불과하다면 내가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결국 나란 존재는 저 높이 계신 전지전능한 신께서 정해놓는 운명대로 살아야 하는 별것 아닌 존재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저 수많은 창조물 중 하나일 뿐이었다.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가 사는 이유가 이미 정해졌다면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이런 생각이 끊임없이 머릿속에 맴돌았고, 그것을 나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자니 왠지 인간의 삶이 단순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었지만, 그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또 다른 이야기였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분인가 아니면 이용하시는 분인가, 하나님과 나의 관계의 진정성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늘 그러듯 키우던 작은 애완견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꼬리를 흔들며 좋다고 달려오는 녀석에게 과자를 하나 던져주고 맛있게 먹는 모습을 서서 내려다보는데 갑자기 서글퍼졌다. 순간 그 개에서 내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과자를 던져준 사람은 하나님 같았고, 꼬리를 흔들며 좋다고 받아먹는 개는 나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자존감도 생각도 없이 저렇게 단순하게 사는 모습이 나였던 것이다. 갑자기 허탈해지며 이것이 신과 인간과 관계의 한계인가, 이것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인가, 결국 인간은 신이 던져주는 복이나 은혜를 바라보며 생각 없이 살아가는 그런 존재 밖에 되지 않는 것인가 싶었다. 그리곤 개를 쳐다보며 슬픔에 젖어, “어쩜 넌 나와도 같구나” 라고 말하며 내 신세를 한탄했다.바라보고 있던 개에게 묘한 연민이 느껴지며 쓰다듬어 주려고 몸을 낮추고 손을 내미는데 문득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개를 위해 죽을 수 있을까?’ 질문과 동시에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내가 미쳤어 개를 위해 죽게!” 소리치며 기막혀 했다. 그리고 그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는 개와 개 주인의 관계가 아니었다. 목숨까지 내어 줄만큼 사랑하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이다.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시며 지키신 소중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죽음으로 증명한 사랑이다.성경을 다시 보니 이사야서 43:21절을 내가 오해한 것이었다. 43장 전체를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놀라운 일들로 가득하다. 우리를 향한 축복과 약속의 말씀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예배이다. 내가 하나님을 찬송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은 나에게 찬송 할 이유를 주셨다는 것이다. 말씀의 초점이 거기에 있다. 놀라운 사랑과 약속을 받은 자의 벅찬 감동의 반응이 바로 예배인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나의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다.“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너희가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로마서 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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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4
    [오피니언] The letter 13 김광근 - 침묵하시는 하나님으로 느껴질때 크리스천헤럴드2025.09.15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시편 13편 1절우리는 신앙의 길을 걷다 보면 종종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간구해도, 하늘은 닫혀 있는 듯 느껴지고, 하나님의 응답은 들리지 않습니다. 다윗도 그러한 절망을 토로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하나님께 버림받은 듯한 절망을 토로했습니다. 시편 13편은 그의 절규로 가득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신뢰로 마무리됩니다.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부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의 훈련입니다. 우리를 자라게 하시고, 말씀에 뿌리내리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간접적인 통치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 우리는 신앙의 뿌리를 감정이나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과 '말씀'에 두게 됩니다.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지 않으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깊이 신뢰하게 하십니다. 침묵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일하고 계십니다 그 침묵을 견딜 줄 아는 신앙이 진짜 신앙인 것입니다.하나님이 침묵하시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러므로 침묵의 시간에도 우리는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그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침묵은 끝이 아니라 성장의 시작이며, 하나님은 침묵 속에서도 우리를 가장 정확하게 이끌고 계십니다.오늘 하루도, 침묵하시는 하나님으로 느껴질때... 말씀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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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3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존재를 존중하는 일이다 크리스천헤럴드2025.09.03
    “당신의 아이가 더 똑똑해질 수 있다면, 선택하시겠습니까?”이 질문은 이제 공상과학의 영역이 아니다. 최근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확산되고 있는 ‘배아 유전자 선택’ 서비스는, 부모들이 시험관 아기 단계에서 여러 배아의 IQ를 예측해 가장 높은 지능을 가질 가능성이 있는 배아를 선택하게 한다는 뉴스의 내용이다. 비용은 최대 5만 달러에 이르지만, 그럼에도 수요는 꾸준히 늘고 있다고 한다.부모들은 왜 이런 선택을 하게 되는가?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실리콘밸리 부모들은 자신들이 ‘성공’한 이유를 똑똑함과 노력, 그리고 좋은 유전자 덕분이라고 여긴다. 그런 혜택을 누린 부모들은 자녀에게도 ‘같은 조건’을 주고 싶어 한다. IQ 예측 기술이 이런 혜택을 가능하게 한다면,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논리다.이런 부모들의 심리 상태는 단순하지 않다. 자녀의 미래를 위한 사랑과 열망이 있지만, 그 밑바닥에는 강박에 가까운 불안과 통제 욕구가 자리잡고 있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성공을 유지하려는 엘리트 계층의 계층 재생산 욕망도 배제할 수 없다. 유전자까지 설계하려는 시도는, 인간이 ‘하나님 흉내’를 내려는 태도이기도 하다.그러나 이 기술의 문제점은 결코 가볍지 않다. 첫째, 예측 모델을 개발한 교수의 말에 의하면, 예측 정확도가 낮다. 최대 3~4점의 IQ 차이밖에 기대할 수 없다고 한다. 오히려 높은 IQ를 가진 배아가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질 위험도 더 높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한다. 둘째, 더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윤리 문제다. 생명을 선택하고 버리는 행위, 인간의 가치를 숫자로 판단하는 사고방식은 생명의 존엄성을 해친다. 셋째, 계층 불평등 심화다. 부자들만이 ‘우월한 유전자’를 선택하게 되면, 사회는 유전적 차별까지 불러올 수 있다. 생명의 시작 단계부터 ‘우열’을 따지는 구조는 결국, 인간 사회의 근본을 흔들게 된다.우리는 이 기술을 보고 고개를 흔들지만, 이와 비슷한 사고방식이 교회 안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은 간과하기 쉽다. 신앙이 깊은 가정, 아이가 잘 자란 집, 소위 ‘성공한 가정’은 교회에서 본보기가 되지만 때로는 암묵적인 기준이 되기도 한다. 신앙조차 ‘잘 키워야 하는 프로젝트’가 되어버린 시대, 교회는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교회는 성취 이전에 존재를 바라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기에 유전적 조건, 학벌, 성과로 평가받을 수 없다. 또한 바울이 고백했듯, 약함 속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해진다(고린도후서 12:9). 부모의 사랑은 자녀의 성취를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의 여정을 함께 인내하며 걸어가는 것이다.교회는 이러한 가치관을 회복해야 한다. 교회에서 자주 열리는 자녀 교육 세미나는 ‘잘 키우는 법’보다 ‘함께 살아가는 법’을 나누는 자리여야 한다. 성도 간의 대화는 성공담보다 연약함을 나누는 진솔함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가장 연약한 이들을 품으셨듯, 교회는 ‘가장 작고 연약한 이들’을 중심에 두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신앙의 깊이는 성공의 척도가 아니라, 사랑의 밀도로 측정되어야 한다.무엇보다도 교회는 사람을 ‘결과로 판단하지 않는 언어’를 회복해야 한다. “그 가정은 자녀 교육을 잘했다”, “그 아이는 신앙이 참 바르다”는 말은 칭찬처럼 들릴 수 있지만, 동시에 다른 부모와 자녀들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부담과 비교를 불러일으킨다. 말에는 힘이 있다. 교회가 신앙의 여정을 격려하려면, 비교가 아닌 공감의 언어, 경쟁이 아닌 동행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또한 교회는 부모들에게 ‘자녀를 통제하려는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를 신뢰하는 믿음’을 심어주어야 한다. 하나님은 각 사람을 독특하게 만드셨으며, 그 다양성 속에서 공동체는 더욱 풍성해진다. 자녀가 부모의 기대를 채우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 신앙 교육의 본질이다. 교회는 그 과정을 단순한 지도나 교육이 아닌, 공동체 전체의 동반 성장의 장으로 바꾸어야 한다.이 시대는 무엇이든 선택하고 조정할 수 있다고 믿는 시대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선택 불가능한 선물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사랑할 것인가를 가르쳐야 한다. 배아를 고르듯 교인을 고르고, 신앙 유형을 고르고, 사역 스타일을 고르는 시대 속에서 교회는 다름과 한계를 끌어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세상과 다른 교회, 은혜가 말이 아니라 삶이 되는 교회의 모습이다.믿음의 공동체가 다시 한 번 ‘생명은 선물이다’라는 진리를 소통할 수 있다면, 교회는 세상의 통제 열망을 넘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증언하는 공간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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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2
    [오피니언] 후회와 회개 크리스천헤럴드2025.09.03
    후회와 회개는 다르다. 앞을 보면 같지만, 뒤를 보면 확연한 차이가 있다. 앞을 보면 자기성찰로 시작 되어 같아 보이지만 뒤로 가면 결과가 다르다.회개는 회복으로 이어지는 반면, 후회는 더 깊은 좌절에 이르게 한다. 회개는 분명한 대상이 있어 그에게 저지른 행동을 뉘우치고, 용서를 받음으로써 그 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그러나 후회는 스스로가 대상이어서 자기가 자기자신을 용서하고 자유로울 수 없으니 오히려 더 큰 무력감과 깊은 상처가 남는다. 그래서 회개로 나아가지 않는 자각심은 자기연민으로 남아 평생을 그 후회의 순간을 떠나지 못하게 하며, 그 주위를 맴돌게 한다. 엉뚱한 참회는 바로 후회이다.후회가 없는 인생은 없을 것이다. 나 또한 내 삶에 많은 후회가 있다. 기억에서조차 지웠으면 하는 부끄러운 잘못과 실수들이 있다. 돌이킬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 잠시 머물게 될 때도 있다. 머리 속 깊이 박혀있는 후회의 순간들은 나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발목을 잡을 때도 있다.그러나 그 후회마저도 복음의 눈을 통해서 바라보고 해석해야 한다. 후회가 많은 인생이기에 죄인을 찾아오신 주님을 만나게 되었고,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이 있기에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사랑을 찾게 되었다. 오늘도 허다한 후회를 덮는 은혜를 날마다 경험하며 살고 있다. 그러니 지금 내가 나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여전히 부족하기 짝이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나는 바로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의 결과물인 것이다.그러니 한 순간도 후회 속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설령 돌이킬 수 있다 해도 돌이켜서는 안 된다. 내 삶에 수없이 발견되는 하나님의 손길을 어찌 지울 수 있겠는가. 나의 악까지도 선으로 바꾸신 하나님의 열심이 내 삶에 가득한데 그것을 어떻게 외면하고 이전으로 돌아가려 하겠는가. 나 삶의 후회를 지우려 할 때 그가 일하신 흔적도 함께 지워야 한다.그러니 나의 나 된 것을 감사하며 오늘도 그 은혜로 받은 새 삶을 기뻐하며 살아야 한다. 내 삶에 끊임없는 회개는 있을지 언정 후회는 없어야 한다. 어제의 후회와 무력감에 빠지지 않고 오늘 내가 받은 은혜가 헛되지 않게 다시 시작하는 모습이 진정한 회개이며, 은혜에 부응하는 삶이다. 오늘도, 내일도 계속해서 실수와 부끄러움이 반복 되겠지만, 또 다시 뉘우치고, 털고 일어서야 한다. 밭을 가는 자가 뒤를 돌아보며 앞의 땅을 제대로 갈 수 없듯이, 어제의 후회에서 벗어나야 앞으로 전진할 수 있다. 나는 내게 주어진 길을 걸으며 새로 허락된 오늘을 소중히 가꾸며 살아야 한다. 후회에 대해서는 날마다 죽고, 회개로 다시 일어나 새날을 살아야 한다."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10)"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눅 9:62)"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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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은주 교수의 탈진을 긍정하라 21- 탈진 관점으로 본 선교사 이야기 9 윌리엄 스크랜튼 크리스천헤럴드2025.09.03
    조선 초기 선교사들의 스트레스와 탈진은 동료 간의 갈등이 한몫을 차지한다. 선교사들 간의 서로 의로운 경쟁과 충돌 및 복음을 향한 열정이 빚어낸 과정 중의 문제이다. 세계복음주의연맹은 매년 20명 중의 1명이 선교 사역을 중단한다고 밝혔다. 그 중에 직무 역할과 관계 갈등은 사유 중 하나이다. 특히 의사직은 정서적 탈진 비율이 높다. 의사 윌리엄 스크랜톤(William B. Scranton)은 1885년 5월 제물포를 거쳐 정동에 도착했다. 알렌 선교사를 돕다가 그해 9월에 자신의 집에서 정동병원을 개원했다. 그는 “민중이 있는 곳에 병원이 있어야 한다”는 신념 하에 가난하고 소외된 백성을 위해 무료진료를 해주었다. 서대문, 남대문, 동대문 지역에 시약소를 설립하고, 남대문 주변에 병원과 병원 내 상동교회를 설립했다. 그는 민중과 함께 복음을 전하여 민족운동가 전덕기를 양성했다. 전덕기는 스크랜톤의 인덕에 반해 그의 집에서 일하며, 세례를 받았고, 독립협회와 을사늑약 무효 상소운동과 전도활동을 펼쳤다. 상동교회는 민족독립운동을 준비시키고, 33인 민족대표 여러 명을 배출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스크랜튼은 감리교 선교사업을 총괄하고, 시병원, 상동과 애오개의 진료소, 정동의 보구녀관을 돌보았고,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교육을 감독했다. 그는 광산소속 의사, 금광 부속병원 사역 등 조선에서 31년간의 사역을 감당했다. 그의 어머니 메어리 스크랜튼은 조선의 여성 교육의 대부인이었다. 그녀는 1886년 5월 31일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을 설립하고, 여성들만의 주일학교 조직, 여선교부 주관의 동대문선교사업, 공옥여학교 설립, 감리교 협성여자신학교의 발전 등 여성들의 불평등과 억압에서 해방하며, 여성교육과 복음전도의 소명을 다했다.필자는 스크랜튼의 탈진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신체적 탈진이다. 그는 의사로서 1886년부터 1889년까지 연인원 12,209명, 1901년까지 5만명에 이르는 환자를 치료했고, 교육, 출판, 행정, 토착 전도와 양성, 신학 교육 등 과중한 업무를 수행하므로 탈진했다. 스크랜튼 대부인도 많은 사역으로 고된 사역과 100마일이 넘는 거리를 도보로 순회전도 하며, 만성 설사와 여러 차례의 중병과 뇌졸중을 치뤄 탈진을 했다. 둘째, 심리적 탈진이다. 스크랜튼은 세 번의 큰 갈등을 경험했다. 고집 센 맥길은 조선 감리교선교 관리자인 스크랜튼에게 순응적이지 않아 갈등을 빚었다. 조선선교 회계를 맡은 아펜젤러는 먼저 예베당을 지으려 하고, 스크랜튼은 빈민선교를 우선시하여 병원을 세우려 함으로써 갈등을 빚었다. 미국 감리교 선교부와 조선에 주재하는 선교사들은 아펜젤러를 지지했다. 배재학당의 정체성 문제도 스크랜튼의 견해가 무산되었고, 올링거와 긴장이 있었으며, 친일 인사 해리스와도 정면 충돌했다. 그는 조선 감리교선교 관리자 및 후일의 총리사와 감리사로서 실패했고, 자신의 권위에 소상을 입었다고 느꼈을 것이다. 스크랜튼은 늘 완벽하고 원칙주의자로서 제안을 했지만, 매번 지지를 얻지 못했고, 선교 인력을 보충해달라는 요구 조차도 외면당했다. 선교본부와 다른 동료 선교사들에게 호응을 받지 못하므로 심신이 탈진했다. “수지청즉무어, 인지찰즉무도(물이 지나치게 맑으면 고기가 없고, 사람이 지나치게 살피면 따르는 무리가 없다)”라는 구절이 있다. 중립과 타협이 없는 꼿꼿한 그에게 갈등과 충돌은 심신의 탈진이었다. 결국 선교사를 사임했다.셋째, 문화적 탈진이다. 조선당시 하층민 여성은 매매의 대상이었고, 남자 선생이 남녀내외법 가운데 이화학당에서 교육을 시키는 것은 항의 적이었으며, 기독교금지법이 존재하는 사실을 알고도 교육과 복음을 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스크랜튼의 탈진회복 방법을 모색한다. 첫째, 희생과 헌신이다. 스크랜튼은 장티푸스 병에 걸렸을 때 회복하게 된다면, 조선으로 가겠다고 서원한 것을 지켰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따라 헌신하고, 조선을 위해 희생했다. 둘째, 소명의식이다. 그는 엘리트 집안의 상위 1프로에 해당했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가난하고 병든 민중을 위해 소명을 감당했다. 자신의 집을 개조해 정동병원을 세웠고, 소외된 백성이 거주하는 변두리에 병원과 교회를 설립했다. 셋째, 겸허한 자세이다. 선교부와 동료 간의 갈등과 충돌로 인해 조선에서 22년간의 감리교 선교사직과 목사직을 사임했지만, 성공회로 이적하여 평신도 의사로서 10년간이나 더 개인사역을 했다. 자신의 위치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소신껏 의사로서 사명을 다했다. 넷째, 휴식이다. 그는 평범한 일반 사람의 집에서 민박을 하며, 안식했다. 스크랜튼 대부인도 중병으로 인해 휴가를 떠났지만, 회복 후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사역에 진력했다. 휴식은 영혼육의 안식이 된다.서로 간의 갈등이 있을 때 갈등 전환의 변화를 인식하고, 자기를 성찰하며, 하나님을 발견하는 시간으로 본다면, 자신이 나아갈 방향과 더 성숙한 기회를 경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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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The letter 12 김광근 - 속박을 끊고 주 안에서 자유를 누리십시오 크리스천헤럴드2025.09.0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군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명에를 메지 말라"-갈라디아서 5장 1절우리는 자유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하지만, 많은 이들이 여전히 보이지 않는 사슬에 묶여 살아갑니다.성취에 대한 강박, 타인의 시선, 과거의 상처, 그리고 죄책감 등등.겉으로는 선택의 폭이 넓어졌지만 내면은 여전히 얽매여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바율은 이러한 종속의 실체를 정면으로 다루면서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는 단순히 제도의 해방이 아니라, 죄와 율법의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말합니다.당시 갈라디아 교회는 다시 율법적 행위를 붙잡으려는 유무에 놓여 있었습니다.바울은 이들을 향해 단호하게 "군건하게 서라."고 말합니다. 자유는 단지 주어진 권리가 아니라, 지켜야 할 책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율법의 의무에 자신을 다시 얽매이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일이었습니다.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 36절에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이자유는 자율이 아닌 거룩함의 방향으로 향합니다.즉, 자기중심적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반응하는 삶입니다. 자유는 결국 사랑 안에서 완성됩니다(갈 5:13).타인을 섬기고 세상을 항해 복음을 전하는 삶은 더 이상 의무가 아니라 속박을 끊고 자유를 누리는 자의 기쁨입니다.이번 한주간도 주 안에서 자유롭게 그러나 책임 있게 살아가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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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하루한장 말씀 - 하나님이 찾으시는 한 사람 크리스천헤럴드2025.09.03
    요즘 저는 한 명의 축구선수에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바로 손흥민 선수입니다. 아내와 함께 토트넘에서 이적해서 미국으로 오면 좋겠다고 했는데, 정말 최근에 LAFC Team으로 이적을 했습니다. 한 사람으로 인하여 팀의 분위기가 달라지고, LA 한인 타운도 손흥민 특수에 대한 기대감으로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을 통해서 느끼는 변화를 체감할 수 있습니다. 오래전에 Team 61에서 매니저를 하던 폴 윤 형제님이 “목사님, 박찬호 선수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한국 선수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좋겠습니다.” 는 부탁이었습니다. 그 후로 함께 예배를 드리며 기도의 지경을 넓혔습니다. 선수와 연예인과 기업가를 위해서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박지성, 김연아, 박태환, 최민정, BTS, 손흥민 등등, 태극기가 게양 될 때마다 선수를 축복하였습니다. 선수를 위해서 앞서서 기도하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당시, 조선은 총제적 난국 상황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대비책도 없고, 군사적 대응이나 맞서 싸울만한 장수도 없었기 때문에 일본의 침략에 파죽지세로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이라는 용장이 전쟁의 판세를 바꾸었습니다. 12척의 배로 133척의 배를 격침시키는 명랑해전으로 세계의 전쟁역사를 남깁니다. 준비된 한 사람의 영향력입니다.        영적인 전쟁도 비슷합니다. 칠흙같은 어두운 시대 속에서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하여 깨어 기도하는 한 사람이 있으면 영적 판도가 뒤바뀔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뜻을 같이 하는 수많은 군중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릴 ‘한 사람’이면 됩니다. 소돔성은 악인이 많아서 멸망당한 것이 아닙니다. 의인 열명이 없어서 멸망당한 것입니다.에스겔 22:30,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아멘.   성경말씀은 무너진 틈에 서서 중보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막아줄 한 사람을 찾으셨지만, 안타깝게도 그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죄악의 수렁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순종할 경건한, 한 사람을 찾으셨지만 결국 찾지 못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막을 의인 한 사람이 없는 공동체는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이는 깨어 기도하는 의인 한 사람만 있어도 공동체를 살리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타락한 시대를 살려내는 거룩한 의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하나님은 깨어 기도하는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오늘 내가 그 한 사람이 될 수는 없을까요? 이 땅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 교회를 끌어안고 회개하는 사람, 진리로 살아가는 사람, 나 한사람으로 인해서 가정과 민족이 회복되고 깨어나고 살아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새벽묵상 말씀을 준비하기 위해서 새벽 3시, 4시에 일어나는 것은 당연히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선교를 다녀 온 후로 느헤미야서의 학사 에스라처럼 성경전체를 통독하고 한 장씩 말씀을 나누고픈 비전이 생겼습니다. 말씀 묵상을 하고 매일 정한 시간에 녹음하는 것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금은 각 나라와 지역에서 중보자들이 함께 살아가는 기쁨도 생겼습니다. 하나님께 24시간 기도를 드리게 되었고, 하루 10분 더 기도하겠다는 고백이 들려올 때에 “할 수 있다!”는 위로와 힘이 생깁니다. 간단하게 카톡을 보내며 가족들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님께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마음을 드리십시오. 거룩한 기도의 습관으로 승리하십시오. 누군가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나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믿고 기도하십시오. 그분들의 기도로 우리가 승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도하는 한 사람이 되셔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손길을 경험하는 생애가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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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The letter 11 김광근 - 도움은 여호와에게서 내려옵니다 크리스천헤럴드2025.08.07
    "내가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시편 121장 1-2절발밑의 거친 자갈만 바라보면 앞이 막막하지만, 눈높이를 높이면 지형의 윤곽이 보이기에 광야 가운데서 시선을 '산'으로 옮깁니다. 어려움이 길을 가려도, 마음의 카메라 앵글을 위로 돌리는 순간 풍경이 달라집니다. 시선의 전환이 곤 소망의 출발선입니다."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라는 질문은 공허한 수사가 아닌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 뿌리를 두는 확신의 고백입니다. 문제 해결 능력이 '내 안'에 있지 않음을 인정할 때, 우리는 진짜 도움의 근원을 만납니다. 창조주께서 시작하셨다면, 유지와 완성 역시 그분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현실은 변하지 않아도, 방향을 재설정하면 우리의 걸음은 가벼워집니다. 오늘 해야 할 일, 치러야 할 관계의 과제들이 여전해도 '도움이 위에서 온다"는 사실이 마음 깊은 곳을 지지해 줍니다. 고개를 들 때마다 우리는 같은 하늘 아래 있지만.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 안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오늘 하루가 버겁게 느껴지시나요?잠시 걸음을 멈추고 눈을 들어 보세요. 도움은 이미 머리 위에서, 천지를 만든 분에게서 오고 있습니다. 그 시선이 여러분의 걸음을 밝히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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