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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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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하루한장 말씀 - 밥값도 못하는 저에게 전도할 능력을 주옵소서! 크리스천헤럴드2024.03.16
    새해 사역의 우선순위를 전도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교회 리더십들도 한마음으로 응원해 주셨기에 너무 감사했고 각자의 의견을 피력해 주셨습니다. 늦은 회의를 마치고  잠들기 전에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책장에서 전도에 관련된 서적을 찾고 있는 제 자신을 돌아보며 ‘피식~’ 웃을수 밖에 없었습니다. 기도부터 하자고 외쳤던 제가 먼저 책장에서 관련 서적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문지식과 전문가의 도움을 무시해선 안되겠지만 기도보다 책을 우선하다니..이런 모습을 누군가 곁에서 지켜본다면 혀를 찰 노릇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면서, 주께서 동행해 주시고 성령의 역사를 사모하길 기도하면서도 어느 순간에 나타난 나의 실제 모습을 보며 내 뼛속의 습관에 부끄러움이 널뛰고 있습니다.결국 여러 권의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전도의 내용은 불변해도 방법은 시대와 지역과 대상에 따라서 전략적으로 달라져야 합니다. 전도의 방법 때문에 전도의 내용마저 비난을 받지 않도록 전도의 방법을 새롭게 바꾸는 시도가 필요합니다.’ 라는 김 두식 목사님의 글을 발견했습니다. 최근에 ‘복음도 시대와 문화의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고 썼던 컬럼 내용과 일맥상통하면서 마음에 격한 공감을 불러 일으킵니다.전도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이고(마태 28:10~20),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한 성도의 최선 최고 최후의 사명입니다. 매일 미디어 콘텐츠를 만들고 복음과 은혜가 전해지도록 준비를 하고 있음에도 또 예수님을 전하고 믿으라는 설교와 글을 계속 쓰면서도 정작 저는 지난해 한 명도 전도하지 못했습니다. 저를 믿고 따라주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알면 창피스럽기까지 한 일입니다. 목사의 사명이 전도인데 한 명도 못했습니다. 저는 밥값도 못하는 목사입니다.이단들이 우리보다 전도를 더 잘합니다. 가까운 친구가 결국 이단에 속하게 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안타까워서, 너무 미안해서 울며 토악질을 하며 기도했습니다. 순수하게 예수님 밖에 모르던 친구와 교인들이 마음이 흔들릴 때에는 가슴이 철렁합니다. 솔직히 속에서 열불이 납니다. 목사 선교사인 제가 복음을 더 간절하고 강력하게 전하지 못해서 괴롭습니다. 마침 오늘 새벽기도는 예레미야 23장인데 말씀에 ‘쑥을 먹이고 독한 물을 마시게 하리라’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맘대로 해석해서 영혼을 살리지 못한 이스라엘의 거짓 선지자들을 향한 경고의 말씀을 읽고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레이너 척도’라는 불신자들에 대한 복음의 반응 정도를 수치로 나타낸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미국의 전도 전문가 탐 레이너(Tom S. Rainer)는 The Unchurched Next Door(Zondenvan,2008)가 각 불신자 그룹의 특징과 비율을 담은 ‘레이너 척도’를 그린것인데 불신자를 U5에서 U1의 5단계로 구분하고 수치를 냈습니다. U는 불신자(Unchurched person)의 약자로 U5는 복음에 적대적인 그룹으로 5%정도, U4는 복음을 거부하는 그룹 21%, U3는 복음에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는 그룹 36%, U2는 복음에 우호적인 그룹으로 27%, 마지막으로 U1은 복음에 매우 열려있는 그룹으로 11% 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탐 레이너는 불신자들의 반응 태도는 거주지역이나 인종, 성별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했습니다.오렌지카운티 대형 한국마켓들이 있는 사거리에는 날마다 전도하는 성도님들이 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고하는 무명의 거리 전도자들에게 감사와 격려, 칭찬을 드리고 싶습니다. 죄인들을 향한 복음 전도는 어느 시대든지 마귀의 집중 공격과 거센 도전을 받아왔습니다.우리가 하루 세 끼를 챙겨먹어야 하듯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전도는 생활속에 지속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불신자들이 욕하고 미워하고 비방하고 핍박해도 항상 그 자리를 지키고 더 간절하고 힘차게 부끄러움 많은 나를 대신해서 목이 쉬도록 외치는 분들의 전도열정을 존경합니다.전도는 목회자와 성도님들이 한 마음으로 전해야 하는 사명입니다. 올해는 전도의 능력을 더욱 간구하려합니다. 골로새서 1:29 말씀처럼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겨봅니다.온 성도와 지상의 교회가 참여하는 전도운동의 중요성을 새삼 절실히 느낍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믿고 순종하면 전도의 아픔과 실패도 영적근육과 경험의 산물로 삼아서 부흥의 성장동력이 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전도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나도 살고 이웃도 살리는 운동입니다. 주여, 밥값도 못하는 저에게 전도의 능력을 주옵소서! (더 기도! The Pr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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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지성적(知性的)이어야 한다 크리스천헤럴드2024.02.24
    코비드 이후, 교회는 많은 노력을 하지만,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코비드 이후 예배당 참석이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교인들을 교회 출석시키는 것만이 목적이 될 수없다. 이번 기회에 교회의 근본적인 점검과 대책 마련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한다.미국 기독교 대표적인 철학자이며 변증가인 모어랜드(J.P. Moreland)는 그의 책 그리스도인을위한 지성 활용법(Love Your God with All Your Mind)에서, 미국 교회의 무너짐은 반지성주의때문이라고 말한다. 80년대부터 교회가 숫적 성장이 급속하게 일어나면서, 교회는 지성주의를 버리고 반지성 주의를 표방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결국은 세상의 지성 주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교회의 가르침을 듣지 않게 되고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그러나 사람이 몰리던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하는 교회는 근원적 이유를 파악하기보다는 더열심과 프로그램 중심으로 사람들을 모으려고만 하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교회는 더욱 자극적인 예배를 추구하고, 며칠 동안 모아 놓고 찬송하고 기도하며 감성을 터치하려는프로그램으로 급하게 사람들을 변화 시키려고 한다.그런데 안타깝게도 세상의 지성 주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 특히 젊은 세대나 지성을 추구하는사람들은 교회의 이런 모습에 고개를 돌리고 있고, 그런 프로그램이 직분을 받거나, 교회의구성원이 되는 과정이 되는 것으로만 참석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나마 참석하는 사람들이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그러면 교회는 점점 노쇠화될 것이고, 이미 그런 모습은 드러나 있다. 교회가 다음 세대에 대하여우려도 많이 하고, 기도하지만 그것 뿐이고,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없으니, 이제는 세상만 탓하고있다. 물론, 이미 인구절벽 현상일 일어나고, 학교들 마다 학생 수가 줄어들고 있는 것은 낯선일이 아니지만, 교회는 변화하는 세상에 휩쓸려 갈 수 없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때문이다.지구상에 사람이 줄어들어도, 교회는 끝까지, 마지막 남은 한 사람에게까지 복음을 전하고 그사람을 그리스도의 제자 삼는 대위임령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교회는 2가지를 지금부터라도 집중해서 해야 한다.첫째, 목회자들은 성경 연구를 깊이 해야 하고, 폭넓은 독서를 하되, 문화 공부를 해야 한다. 성경연구는 깊은 주해를 의미한다. 익숙한 본문을 익숙하게 보고 가볍게 정리하여 설교하지 않고,깊은 묵상과 기도 그리고 좋은 주석 및 참고 도서들을 참고하여, 하나님이 성경을 기록하신목적과 의도를 연구하고 설교를 준비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목회자들은 문화를 연구해야 한다. 이미 문화에 관련된 많은 자료가 있고, 여러 의견이 정리되어 있다. 그 문화에 사람들이 젖어 살고 있기 때문이다.둘째, 목회자들은 성도들을 많이 만나야 한다. 성도들이 겪고 있는 삶의 이야기들을 경청해야한다. 예전에는 목회자가 서재에서 만들어낸 설교를 전해도 성도들은 그 설교를 잘 들으려고했지만, 이제는 그 정도의 내용은 세상에서도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 이상 들으려 하지않는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지금부터는 성도들로부터 들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의 문제와 마음을 성경으로 풀어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교회는 목회자들이 이렇게 준비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지금이 가장 중요한 때이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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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
    [오피니언] 샘신칼럼 - 하나님은 당신의 소망을 통해 일하십니다 크리스천헤럴드2024.02.24
    디즈니랜드는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관광지입니다. 내가 사는 곳에서 디즈니랜드까지 차로 35분 거리로 디즈니랜드를 두 번 정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최근에 한국에서 손님이 오셨을 때입니다. 그러면 “미국에 오신 지 오래되지 않았나요” 라고 묻게 될 수도 있겠죠?아니요, 어린 나이에 양자로 미국분들을 통해 알래스카로 입양됐습니다. 캘리포니아로 이사해서 벌써 38년이 넘도록 로스앤젤레스에서 살고 있습니다. 또한 LA 폭동이 일어났을때는  Santa Ana 경찰로 일했습니다.그리고 LA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러면 아니 그동안엔 왜 디즈니랜드에 가지 않았나요?” 라고 묻게 될 것입니다.그것은 구경하는 것을 그다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디즈니랜드를 가고 싶은 욕구가 없었고, 가야겠다는 소망이나 목표가 없었습니다.여기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법칙을 발견하게 됩니다: 소망이나 목표가 없으면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NY이나 한국에 산다 하더라도 디즈니랜드를 보고 싶은 강한 소망이 있다면 디즈니랜드를 목표로 삼고 방문할 것입니다. 그 목표는 언제나 달성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이제 이 원리를 우리의 신앙 생활에 적용해 보고자 합니다. 사람들의 삶은 소망이나 목표에 따라 달라집니다.성경을 읽으려는 소망이나 기도하는 목표가 없다면 그 사람은 성경을 읽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성경을 읽을 시간이 없다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하지만 성경을 읽고자 하는 강한 소망이나 목표가 있다면 그 사람은 시간을 내어 성경을 읽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빌립보서 2:13-14) 기억합시다.(1)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일하십니다.(2) 하나님은 우리 안에 소망을 주시고 우리로 그것을 이루도록 하십니다.(3) 따라서 우리는 원망하거나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위의 사실에서 아주 중요한 것을 발견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소망을 주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소망을 주시면 다른 사람에게는 이상해 보일지 몰라도 그 사람은 그 소망을 따라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비판을 듣기도 합니다.바울을 구원하신 하나님은 바울의 마음에 이방인을 구원하고자 하는 소망을 주시고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사용하셨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 어려움이 바울의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소망을 없애지 못했습니다.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 마음에 소망을 주십니까? 이 신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하지만 다음 성경구절에서 이 신비의 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 오지 않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나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이사야 55:11) 하나님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하나님의 뜻, 의도, 소망, 목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치 사과 씨 속에 사과 나무의 생명이 담겨 있는 것과 같습니다.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순종이란 무엇입니까? 자신의 뜻을 굴복하는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부모에게 순종한다면 우리의 뜻이 부모님의 뜻에 굴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는 것이며, 우리의 뜻을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우리 마음을 지배한다는 것입니다.하나님과 관련 없는 소망은 후회를 가져오지만, 하나님이 주신 비전은 의미와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하나님의 말씀(뜻)과 나의 순종(뜻)이 만나면 우리는 하나님과 연합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하나가 되는 순간입니다. 그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믿음의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오직 순종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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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
    [오피니언] 신선묵 교수의 교수칼럼 - 공감과 함께 해주기 크리스천헤럴드2024.02.24
    지도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다. 사람들을 수단으로 삼지 않고 목적으로 삼으며 섬기는 것, 그 사람이 진정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지도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지도력뿐만 아니라 바른 인간관계의 모습이고 참된 공동체가 가져야할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경우에 사랑과 섬김이라는 이유로 상대방을 위한다는 이유로 가르치려하고 분석하려고하고 상대방을 구속하거나 상처를 주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자신에 솔직하면서도 자유함을 가질 수 있는 참된 관계와 공동체를 그리워한다. 이런 현실 속에서 파커 팔머가 제시하는 고독함을 유지시켜주는 공동체의 원리 즉 신뢰의 서클이라는 개념이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사람들로 하여금 방황하고 성장하고 스스로 대답을 찾아갈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그런 모습의 관계이다. 훌륭한 코치나 상담가는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들어주는 것이다. 상담을 찾는 사람들은 어떤 대답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스스로가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것을 정죄하지 않거나 가르치지 않고 고민을 들어주고 함께 해줄 사람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파커 팔머의 표현을 빌리면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영혼 속에 있는 교사의 말을 듣는 것이고 우리가 옆에서 해줄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이 관계 속에서 혹은 공동체 속에서 스스로 자신과 대면하는 고독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장을 제공해 주는 것이라는 것이다.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경청은 매우 수동적인 것 같지만 동시에 매우 적극적인 행동이다. 문제 해결을 해주려고 나서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매우 수동적인 것 같지만 고독 가운데 스스로 해 나아가는 것을 옆에서 함께하고 들어준다는 점에서는  매우 적극적인 행동인 것이다.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사실상 많은 경우 그 문제가 어떤 의미에서 문제인지도 파악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주려고 하고 우리의 해결책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냉정하게 뒤돌아서면서 내 말을 듣지도 않으면서 왜 물어봐하고 분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관계가 아니다. 진정한 관계란 함께하면서 들어주고 스스로 대답을 찾아가도록 기다리고 도움을 주는 것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이러한 상태에 있기를 힘들어 하고 참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문제를 풀어주던지 아니면 관계를 끊던지이지 하면 좋은데 문제를 풀어주지 못하면서 그 문제 속에 함께 있기를 힘들어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상태가 그런 것이다. 해결책을 말하지 않으면서 그 사람과 함께 해주는 것이 그 사람을 향한 최선의 사랑인 것이다.파커 팔머는 이런 상태를 정확하게 전달하기위하여 임종의 이미지를 사용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는 임종의 자리에 있을 때에 우리는 그저 무기력하게 옆에서 손을 잡고 바라만 볼 뿐이다. 우리가 그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다고 그냥 돌아서 버리지는 않는다. 죽어가는 사람이 자신의 최후의 고독의 순간, 자기만이 감당할 수 밖에 없는 순간을 지나고 있는 것이고 우리는 옆에 있는 사람으로써 그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 그러나 단지 그곳에 함께 있을 뿐이다. 실제로 그 문제를 닥치고 대면하는 것은 그 사람이 고독하게 해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죽음의 순간 뿐만 아니라 인생의 모든 문제가 궁극적으로 고독하게 당면해야 하는 것이다. 이 때에 우리가 섣부른 정답을 제시하고나 문제를 해결해주려고 하는 것보다는 혹은 냉정하게 돌아서는 것보다는 그 사람이 이 순간을 잘 이겨나갈 수 있게 옆에서 지켜봐주는 것이다. 결국은 그의 문제이지만 혼자 두지않고 그 사람의 결정을 도와주고 격려해 주는 관계인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공감인 것이다.오늘날 우리 삶 가운데 누구보다도 필요한 사람은 지식이 많은 사람이 아니고 유명한 사람도 아니고 우리의 어려움을 공감해주는 친구가 필요하다. 우리가 나의 삶의 어려움을 진정으로 공감해주고 내가 그래서 건강하게 다시 설수있게 해주는 친구가 있을까?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의 고통 가운데 손을 잡고 함께 있어줄 친구를 필요로 한다. 우리가 그런 지도자 그런 코치, 멘터가 되어야할 것이다. 좋은 소식이 있다. 우리에게는 그런 좋은 친구가 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아픔을 들어주시고 공감해 주시는 분이시다. 히브리서 4장 15-16절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가 힘들고 외로울 때에 우리 예수님을 찾아가 우리의 모든 아픔을 나눌수 있다. 그는 우리에게 잘 경청하시는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아픔을 공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주위의 친구들에게 이런 함께하며 들어주는 친구가 될수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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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송경화 교수 칼럼 - 신앙 전수를 위한 자녀양육 : 공유하는 삶과 강요되는 신앙 크리스천헤럴드2024.02.24
    청소년기에 아이들의 신앙은 종합적-관습적 신앙(Synthetic-Conventional faith)으로 발달한다. 이전에는 부모나 가까운 어른들의 영향이 지배적이었다면, 이제 아이들은 부모의 영향에서 벗어나 친구들의 경험이나 미디어 등을 통해 훨씬 다양한 참조를 얻게 되고,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해서 신앙의 체계를 발전시킨다. 이 시기는 에릭슨에 의하면 자기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확립해 가는 시기이기 때문에 아이들은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도 무언가 나름대로의 체계를 정립하고자 노력하고, 이런 신앙 체계가 자아정체성을 세워 나가는 데에도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이 시기의 신앙은 독자적이고 자립적이라기 보다는 자기가 경험한 다양한 것들을 종합하고 주변 환경에 순응하도록 발전시킨 모습으로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상당히 의존한 모습을 띈다. 청소년기의 아이들은 인지발달이 완성된 수준에 이르기 때문에 추상적이고 복잡한 교리와 성경 내용도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시기 아이들에게는 적극적인 성경 공부와 토론의 방법이 도움이 된다. 또한 소속된 공동체의 모습을 반영하는 신앙을 발달시키기 때문에 공동체가 소속감을 느낄 수 있게 해 주고, 확실한 신앙 예식의 모습을 가르친다면, 그것을 별다른 저항없이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는 많은 교육과 활동이 아이들의 신앙 발달에 도움이 된다. 한편으로, 이 시기 아이들은 다른 사람들의 평가나 기대를 지나치게 강하게 내면화하여 정체성을 형성하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에 청년기의 자율적 신앙을 형성하는 데 장애가 될 수도 있으므로 지나치게 강압적인 신앙의 주입이나 부정적인 평가, 지나치게 높은 기대 수준 등은 이 시기 아이들의 건강한 신앙 생활에 방해가 될 수 있다. 또한 다양한 친밀한 인간관계를 통해 정체성을 형성해 나가는 이 시기에 인간 관계에서 경험하는 배신과 거절은 신앙 발달에도 매우 큰 영향을 미치는데, 인간 관계 전반에 대한 실망과 철수가 하나님과의 관계에까지 적용되어 하나님을 불신하고 떠나기도 하고, 혹은 정반대로 인간 관계에서의 실망으로 인해 인간과는 다른 하나님과의 관계에 더 기대를 하고 집착적이 되기도 한다. 이 시기 청소년들에게 있어 친밀한 인간관계가 이렇게 중요한 것을 염두하여, 부모나 교회 지도자들은 아이들이 안정적인 인간 관계를 갖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며,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부모나 교회 지도자들과 맺는 관계를 친밀하고 안정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하는 게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신앙 발달에 도움이 된다. 청년기에 들어서면, 아이들은 점차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성찰하기 시작한다. 파울러는 이 시기의 신앙의 모습을 개인적-반성적 신앙(Individuative-Reflective faith)이라고 불렀는데, 이제는 남의 관점이 아닌 자신의 관점에서 자기만의 신앙을 정립하려 한다. 그래서 이전에 순순히 받아들였던 공동체의 신앙 내용에 대해서도 성찰하고 비판하면서 받아들일 것과 거부할 것을 스스로 정하게 된다. 이전의 신앙이 교회의 신앙, 부모의 신앙, 주변의 신앙을 여과없이 받아들였다면, 이제는 자기만의 신앙을 찾아가는 단계이다. 청소년기까지는 신앙에 대해 수직적으로 가르치고 어느 정도의 강제를 사용해서 신앙을 전수하는 게 가능했더라도, 청년기에는 더이상 그런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 더이상 신앙은 외부의 강요로는 전수될 수 없게 된다. 이 때 청년이 된 아이가 부모의 신앙을 잘 전수받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부터 부모-자녀 관계가 안정적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자녀가 부모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부모의 신앙이 말 뿐인 신앙이 아니라 실제로 롤 모델로 일상에서 제대로 기능했었다면, 청년기에 들어선 자녀는 스스로 그런 신앙을 자기 신앙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전에 부모와의 관계가 불안정하고 부모의 신앙의 삶의 모습이 바람직하지 않았다면 청년기 아이들은 이 시기에 가차없이 신앙을 버리거나 자기 나름의 신앙 모습을 선택하는데 이는 그가 자라오고 배워왔던 신앙 공동체와는 상관없는 모습의 신앙 체계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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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하루한장 말씀 - 유혹을 이기면 형통합니다 크리스천헤럴드2024.02.24
    우리는 수많은 유혹의 조건들 속에 노출이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족들 중에는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음식물 섭취와 운동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며 자기관리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람이 그리운 우리 삶에서 즐거운 식사의 자리는 빼놓을 수 없습니다. 존경하는 Mento 목사님은 ‘목회는 먹회를 잘해야 한다’고 자주 말씀해 주셨습니다.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풍성한 음식이 준비된 식사의 자리는 마음을 열고 푸근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아무리 식욕이 당기고, 산해진미를 차려놓고, 막역한 친구사이라고 해도 부모의 권유라고 해도 자신의 건강에 해롭다면 섭취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불편하면 식욕이 저하되기도 하고 입맛도 떨어집니다만 본능적 유혹을 이기지 못하면 자신의 생명이 위험해 집니다.얼마 전 드라마에서 유명해진 ‘우영우 팽나무’는 한 자리에 오랫동안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동안 셀수없는 세월의 풍파와 거센 폭풍을 견디고 자리를 지킨 결과’라고 하는 대사는 제 마음에 울림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 유명세의 풍파를 잘 견뎌야 할 것입니다. 우리 이민자의 삶, 나그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랜 세월을 성실하게 꿋꿋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며 살아오신 인생의 선배님들, 초로의 부부를 보면 더없이 존경의 마음이 자리잡게 됩니다. 그분들을 뵐때마다 닮아서 늙어 가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Oscar Wilde는(영국 작가) ‘나는 유혹 외에는 무엇이든지 저항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변하는 세상 속에서는 유혹과 타협하고 흔들리는 자기 기준과 양심의 잣대로 적정선을 유지하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 유혹을 받아들여도 개인의사를 존중하는 것으로 인정합니다. 모든 유혹은 우리를 만족스럽게 채워주고 부족함이 없을 것처럼 다가옵니다. 우리가 아는 정보와 지식으로 들만한 조건들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행복한 인생을 산산조각내고 아름다운 삶의 목적을 꺾어버리는 세찬 겨울 바람이 될 것입니다.창세기 속의 요셉 이야기에서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는 표현이 창세기 39장에만 무려 4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2~3, 21, 23). 성경은 요셉이 형통할 수 있었던 이유를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성경말씀은 진리입니다. 아멘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는 길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어느 곳에 있든지 소망을 품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할 수 있습니다.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상황이 모두 하나님의 계획하심 속에 있음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삶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흔들리면 우리를 이 땅의 유혹에서 이겨내고 지킬 방법은 아무것도 없습니다.대부분의 크리스쳔들이 형통한 삶을 소망합니다. 형통함은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형통함은 과정도 중요합니다. 어떤 조건 속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주를 신뢰하고 거룩함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중에 하나님의 은혜가 덧입혀지는 순간, 우리 삶에 하나님의 선한 능력과 기쁨을 누리며 어떠한 고난도 견딜 수 있는 형통할 새힘을 주실 줄 믿습니다. 사순절을 지나며 곧 3.1절을 앞두고 있습니다. 시절과 시대가 주는 유혹들, 거룩한 영성과 신앙생활에서 다가오는 유혹들, 사람에게서 당하는 유혹을 이기고 우리를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과 하나되어 형통한 생애가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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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아모스 목사의 일터영성 - ‘사랑이 넘칠 때 모든 장벽은 무너집니다’ 크리스천헤럴드2024.02.10
    선한 일을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선한 일을 찾아서 그 일들만 하기에 선한 일들을 해내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들이 이미 선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이 하는 모든 행위가 선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 맞다.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 간다는 것은 두가지 결심을 선행할 때에 가능해 진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겠다’는 결심이 그 첫번째 이고, 두번째는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 가겠다’는 결심이 선행 되어야 한다. 사실 이 두 가지는 결국 같은 말이다. 예수님은 사랑 그 자체 이시자 그 근본이 사랑 이시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닮겠다는 결심이 곧 나는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가겠다 라는 결심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 믿음을 강조한다. 아니, 믿음만 강조한다. 믿음을 이야기 하면서 항상 따라오는 단어들은 성도들에게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오는 말들 뿐이다. 헌신, 희생, 섬김, 충성, 봉사, 출석, 참여, 협력, 헌금 등등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성도들의 속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채, 앵무새가 뜻도 모르고 같은 말들을 되풀이 하듯, 강단에서는 학교에서 수업 강의를 하듯 믿음 이라는 단어만 반복적으로 쏱아 내고 있지 않은가?믿음으로 주일에 가게 문을 닫으세요. 믿음으로 힘들어도 십일조 하세요. 믿음으로 교회일에 충성 하세요. 그 말에 순종했다 치자, 주일에 출석하는 성도의 숫자가 조금 더 늘어날테고, 더 모여지는 헌금으로 교회 사역이 보다 원활하게 돌아갈수 있게 될 것이고, 교회에 일꾼들이 부족해 지지 않을 것 이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여기에 성도들이 ‘사랑’ 받고 있다 라는 요소를 발견할 수가 없다. 사랑은 목적이다, 결코 수단 일수가 없다. 교회 사역의 목표, 목적도 궁극적으로는 성도 여야 하는데 오늘날 교회들은 성도들을 교회 유지, 성장, 부흥의 수단으로 여기고 있음을 과연 부정할 수 있겠는가? 주님이 행하신 일들을 생각해 보라. 단 한번도 제자들과 따르는 이들을 예수님의 사역의 수단으로 이용하신 적이 없으시다. 정녕 그렇다. 단 한번도 없다. 예수님은 언제나 사람이 목적이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 아낌없이 사랑을 부어주셨고,  결과적으로 주님의 사역이 사랑을 통과하지 않은 것은 단 한번도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예수님을 닮아가겠다는 결심은, 바로 나도 모든 일을 사랑을 통해 하겠다 라는 결심인 것을 잊지 말자. 내가 앞으로 만나는 사람, 그 누구라도 난 사랑하겠다 라는 결심이, 위대해 보일순 있어도, 실제로는 실현 가능할까 싶은 어려운 일이다. 그 결심 보다는 앞에서 언급한 두가지 결심, 예수를 닮아가겠다,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가겠다 이 결심에 주목하며 살아가 보자. 내가 사랑의 불로 활활 타고 있는 사람이라면, 내 앞에 그 누가 다가온다 할지라도 분명히 이미 불타고 있는 나의 사랑의 불에 그도 불이 붙을 수 밖에 없다. 주중 일하는 식당 주방에, 지난주에 후안 이라는 히스패닉 젊은 친구가 새로 일을 시작했다. 그 친구 3일째 일하는 날에 나와 함께 일을 하게 되었는데, 어찌나 긴장을 하던지 하는 일들마다 실수 연발이다. 돼지고기 동파육을 EVENLY 잘라서 튀겨내어 오더를 나가야 하는데, 칼질이 서툴러서 동파육 한덩어리가 다 뭉게져서 쓸수 없게 되었다.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동작과 표정이 굳은채로 내 눈치만 살핀다. 아마도 내가 호통을 치며 화를 낼 것 같았나 보다. 나는 누구에게나 늘 하던 대로 씨익 웃음한번 보이고, 입에 손가락을 대고 너랑 나랑만 아는 비밀로 하자는 표시를 해주고 잘못 자른 고기를 쓰레기통에 넣어버리고, 새 동파육을 꺼내서 칼질을 보여주며 찬찬히 가르쳐 주었다. 긴장했던 모습에서 점점 여유를 찾기 시작하더니, 그 다음날 일 할때는 한결 밝은 표정으로 일에 잘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터에서 만나는 히스패닉 아미고들이 나를 싫어하지 않음을 넘어서서 아주 좋은 관계를 이어간다. 나는 한번도 누군가 처음 왔을때 저 친구를 사랑으로 보듬겠다 라는 결심을 한적이 없다. 하지만 일터에 도착해서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리기 전에 언제나 두가지 결심을 먼저 하고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나로 인해 가게가 어떻게 해서든 좋아져야 한다는 결심과, 누구와 일하던지 나로 인해 그들의 삶이 좋아져야 한다는 심플한 결심이 그 두가지 이다. 이 결심이 결국, 사랑의 사람으로 오늘을 살겠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겠다 라는 결심과 다르지 않은 같은 결심인 것을 잊지말자. 우리는 오늘을 살아가면서 많은 문제들을 직면하게 되는데, 무엇보다 힘든 문제는 다름아닌 관계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너와 나 사이에 있는 그 어떤 장벽을 어떻게 해야 무너뜨릴 수 있을까?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우리의 삶에 사랑이 흘러 넘치면 모든 장벽이 무너진다.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은 힘으로만 되지 않는다. 기술로만 되지 않는다. 믿음으로만 되지 않는다. 기도로만 되지 않는다. 갈라디아서 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 사랑을 통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사랑을 통하지 않고서는 믿음은 힘이 없다. 힘만 들고 결국은 공허해 진다. 믿음이 사랑을 통과할때, 믿음이 사랑을 통해 일할때엔 어떤 장벽이던 무너뜨리지 못할 장벽이 없음을 기억하자.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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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어리버리 서민수 목사의 낚시 전도법 - 전도는 홍보다! 크리스천헤럴드2024.02.10
    일반적으로, 상업적인 상품을 소개하는 것을 광고라고 한다.오늘날 상품 하나가 세상에 알려지고 많은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텍스트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소개되는 일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비즈니스에서는 상품을 70%, 마케팅을 30%라고 말한다. 상품 본연의 역할이 상당히 크지만, 그 상품을 효과적으로 알리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노력과 기술 그리고 전략이 필요하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날 교회와 목회자, 성도들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저절로 전도가 되겠지 생각하는 것은 시대 흐름을 이해하지 못한 안타까운 일이다. 전도를 하려면 먼저 커머셜에서 말하는 마켓팅의 단계가 필요한데, 이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품(복음)을 소개하려고 하는 여러분 자신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복음을 전달하는 메신저(messenger), 딜리버(deliver), 스피커(speaker)가 가장 중요하다는 말이다.사실이다.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메신저 된 여러분 각자가 너무나 중요하다. 낚시 전도법에서는 이 메신저와 스피커의 역할을 바로 구원받은 성도, 구원의 확신이 있는 성도, 그리고 제자 된 성도가 감당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전도의 시작과 끝은 사람이다.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복음을 전하는 메신저가 중요하고, 그 메신저를 통해 구원받아야 할 태신자가 너무나 중요하다. 결단코, 구원의 경험이 없고, 감격이 없는 사람은 복음의 메신저가 될 수 없다. 복음을 방해만 하지 않아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구원의 확신이 없는 성도, 진실로 복음으로 회복되지 않은 성도는 결코 복음의 스피커가 될 수 없다.구원받은 우리가 복음으로 회복된 우리가 바로 전도를 위한 가장 기본적이고 효율적인 상품이고, 도구임을 깨닫고 믿어야한다. 늘 그렇지만 복음이라는 상품을 소개하는 사람(전도자)과 상품을 소개받는 사람(태신자)의 관계가 너무나 중요하다. 이들의 관계는 복음서에서도 잘 나타난다.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어 예수님께로 나아오고,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제자가 되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이미 혈연관계거나 친한 친구 혹은 같은 업종에 일하는 동료라는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요한복음 1:40-42)우리가 잘 아는 사도 베드로는 동생 안드레와 함께 어부로 살아가고 있었다. 둘은 형제였고 경제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동생 요한도 형 야고보를 예수님께로 인도했다. 빌립은 베드로와 안드레와 한동네에 살았다. 그는 베드로 형제와 동종 업계에 일하던 사람이었다. 이처럼 이들의 관계는 친밀했고 실타래처럼 얽혀 있었다. 같은 직종에 있던 베드로와 안드레로부터 예수님에 대해 전해 들었던 빌립은 어떻게 전도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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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샘신칼럼 - “감사는 쉬운 일이 아니다” 크리스천헤럴드2024.02.10
    누가복음 17장 11-19절 말씀을 보면 문둥병자 10 명이 예수님 때문에 병이 나았습니다. 그런데 9 명은 자기의 병을 고쳐 준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치 않고 각기 자기들의 길을 갔습니다. 반면에 사마리아 사람 1 명은 자기의 몸이 나은 것을 확인하자 바로 예수님께로 돌아와 엎드려 사례했다는 내용입니다. 10 명의 문둥병자가 다 나음을 입었지만 돌아온 사람은 한 명이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감사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10 명의 문둥병자들이 다 나았습니다. 그러나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를 표현한 사람은 1 명 뿐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감사가 생 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문둥병이라는 무서운 병이 나았으니 당연히 감사할 것 같지만 9 명은 예수님께 오지 않고 1 명만 왔습니다. 9 명은 감사가 없었고 1 명만이 감사가 있었습니다. 10 명 중 1 명이니까 10 %입니다. 문둥병이 나은 9 명은 틀림없이 감사할 조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흔히들 생각하기를 감사의 조건이 있다면 누구나 감사할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감사의 조건이 너무나도 분명하지만 9 명은 감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 서 배울수있는 교훈은 감사의 조건이 있다고 다 감사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있다면 우리 모두는 감사의 조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모두가 다 감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감사는 실력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적다는 것은 예배자가 적다는 말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감사와 예배의 의미가 같기 때문입니다. 감사의 조건이 있음에도 감사하지 못한다는 것은 감사하는 실력이 부족한 것입니다. 감사에 대한 훈련이 되어 있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예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드리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예배 역시 훈련입니다. 그럼 돌아온 한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엎드리어 사례했다고 했는데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문둥병이 나은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께 나아와 엎드렸습니다. 그것은 정확하게 예배에 대한 그림입니다. 예배는 인간이 하나님을 만났을 때 나타나는 반응이요. 하나님의 능력과 속성에 대한 응답입니다. 지금 그는 예수님의 능력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문둥병을 고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인간이 취할 수 있는 합당한 반응인 예배를 예수님께 드립니다. 가장 겸손한 자세로 엎드려 사례하여 예수님께 감사를 표현합니다. 그럼 오늘 말씀에서 발견하게 되는 예배의 정의는 무엇입니까? 예배 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깨닫지 못하면 감사가 없고, 감사가 없다는 것은 예배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배의 성패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느냐 깨닫지 못 하느냐 에 달려 있습니다. 은혜의 분량은 감사의 분량입니다. 또한 감사의 분량은 예배의 분량이기도 합니다. 우리모두가 범사에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우리의 삶이 감사하는 예배자가 다 되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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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조영석 목사의 생각하며 기도하며 - 관 심 크리스천헤럴드2024.02.10
    교회를 가면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젊은 부부들을 보게 된다. 교회마다 젊은이들이 줄어서 인지 더더욱 눈에 띈다. 예배 후 친교실에서 만나면 아이들을 챙기느라 엄마 아빠는 밥이 눈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정신이 없어 보인다. 우리 부부도 그런 시절이 있었으니 그때의 삶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다. 집으로 돌아갈 때도 아기 용품들을 챙겨 유모차에 태우고 바쁘게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며 당시의 경험들이 떠오른다. 아이들이 생기면 어른들의 삶에도 여러 변화가 생긴다. 그 중 하나는 이전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 아기 용품들이다. 무엇이 있는지 알고는 있지만 필요치 않았으니까 잘 모르고, 관심밖에 일이었으니 보았어도 생각없이 지나치게 된다. 우리의 경우는 유모차였다.첫 아이를 출산하고 나서 유모차에 난생처음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아이를 갖기 전에는 관심이 전혀 없던 것이어서 자주 본적도 없고 아는 것도 별로 없어서 어떤 유모차들이 있는지, 어떤 것을 구입해야 하는지 알아보기 시작했다.온라인으로 찾아보고, 아기용품점에 가서 직접보고, 브랜드도 알아보고 가격비교도 해보고 하면서 조금씩 알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부터 갑자기 이상한 현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잘 보이지 않았던 유모차가 갑자기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어디를 가도 유모차가 보였다.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눈에 밟힐 정도로 많이 보였다.좌로 봐도, 우로 봐도, 어디를 보아도 시선을 두는 곳마다 유모차가 보였다. 심지어 가다가 혹시 하며 위를 보아도 건물 위층에 유모차가 보였다. 설마 여기는 없겠지 하며 쳐다보면, 어김없이 그 곳에도 유모차가 있었다. 심지어 유모차 주차장까지 보였다.온 세상이 유모차로 가득했다! 두발 달린 유모차, 세발 달린 유모차, 네발 달린 유모차, 모양과 종류도 셀 수 없이 많고 다양한 유모차들이 가는 곳마다 가득했다. 세상천지에 이렇게 많은 유모차가 있었는지 그때 처음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그 많은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듯 한꺼번에 아이들을 낳아서 유모차가 많아졌을 리는 없고 다만 내가 관심을 갖게 되니 그제서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관심을 갖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우리가 영적인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다. 반대로 관심을 버려야 하는 것들도 있다. 내 마음에 이미 가득한 것들이다. 내가 욕심내는 것들, 나도 모르게 내 시선이 가는 것들, 내 육이 갈망하는 것들은 이미 충분히 나의 관심안에 있다. 이것들은 내 본성이 알아서 자연스럽게 찾는 것들이다. 오히려 관심이 지나쳐 실수를 하고, 잘못된 선택을 할 때도 있다. 관심을 낮춰야 할 것들이란 뜻이다.새해다. 내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정하는 때이다. 내 영이 간구해야 할 것들에 관심이 없어 가까이 있음에도 잊고 살 때가 있다. 옆에 있어도 보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영적으로 무뎌져서 관심 갖지 않고 살 때가 있다. 우리에게 많은 필요가 있지만 그 무엇보다 나의 영을 건강케 하고 생명을 얻게 하는 영적인 것에 가장 관심을 두어야 한다. 그것이 가장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이 나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두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잠언 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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