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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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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최재홍 목사의 하루한장 말씀 - “처음처럼 마지막까지 주 예수님만을!” 크리스천헤럴드2023.09.14
    지역사회를 섬기며 여러 교회의 예배와 행사에 참석해서 순서를 맡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 중에 목사안수식이 아직도 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목회사역을 위해서 늘 기도해 주시는 남가주프라미스교회 창립 12주년 기념주일에 있었던 목사 안수식에서의 일이다. 성도님들을 대신해서 장로님 내외분과 함께 참석중이었는데 목사안수를 받을 분을 소개하는 담임목사님은 “이번에 안수받으시는 분은 11년동안 우리 교회에 오셔서 찬양사역을 감당하시는 동안 한번도 ‘아니오(NO)!’ 라는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씀하실 때에 예배당은 안은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박수소리가 가득 울려퍼졌다. 누군가는 여기저기서 휘파람 소리로도 축하의 표현을 했다. 아멘으로 화답하는 분들도 있었다.어찌 생각해보면 사역자의 마음가짐에 있어서는 지극히 당연한 부분이라고 생각이 들었지만 좀 과하다 싶을 정도였다. 사실 나도 무척 기쁘고 설레기도해서 아내의 눈을 마주하고 엄치척으로 호응했다. 목사안수를 받는 분의  성품이 한 눈에 들어오는 듯했다. 담임목사님의 신뢰를 한몸에 받고 있어서 사역의 출발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참 즐겁고 기쁜 목사안수식이었다.마침 내게 선배의 조언을 부탁하시기에 고심하며 “목회는 내가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하시는 것이니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눈치를 잘 살피셔야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셔야 좋은 목회자가 될 수 있습니다.”라고 전해드렸다. 교단 안수위원 목사님의 권면 중에 ‘초심유지’라는 말씀이 와닿았다. 그러면서 내가 맞았던 그 첫 순간들을 기억해 보았다. 1995년에 목사 안수를 받던 감사와 감격스런 순간, 아내를 만난 순간, 딸 리베카가 태어난 순간, 미국에 도착한 첫날, 담임목회를 시작하던 순간 등등 제 인생의 첫 순간들을 생각하니 원망과 불평을 했던 몇가지 일들이 떠올라서 부끄러움과 죄송함으로 가슴이 가슴이 뛰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눈으로는 목사안수식이 펼쳐지고 있었지만 마음 속에서는 십자가를 떠올리며 주님께 깊은 회개와 죄송함을 품고 지난 사역을 되돌아 보는 시간이었다.이 교회가 개척한 이후로 새벽 4시 30분에 문을 열고 기도를 드리는 어느 한 장로님의 헌신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되면서 교회를 위하여 고단한 새벽 잠을 깨우고 성전의 문지기로 서원을 드리고 일터로 달려나가는, 자기 인생을 전적으로 내드리는 숨겨신 헌신과 섬김이 있었다는 사실에 큰 감동이 밀려왔다.인생을 마칠 때까지 목적을 가지고 마지막까지 달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힘든 일이다. 세월이 지나도, 상대와 환경이 바뀌어도 변함없이 이어가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성경의 인물들 처럼 환란과 핍박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를 지은 노아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생명을 건 다니엘의 변하지 않는 믿음처럼,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처럼 말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욘 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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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신선묵 교수의 교수칼럼 - 선교적 영성 (1) 크리스천헤럴드2023.08.25
    오늘날 하나님의 선교, 선교적 교회론 등의 출현으로 하나님의 선교 활동을 신학의 중심으로 삼고 그 관점에서 성경을 보고 신학화하고 영성을 이해하는 관점이 대두되고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영성을 접근할 때에 존재적인 영성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그것의 표현 방식의 한 부분으로 그의 사역과 선교를 이해한다. 그러나 이와는 다르게 하나님의 선교의 관점에서 그의 선교 사역을 이해하고 그것의 기초로써 존재적인 영성을 볼 수 있다. 전통적인 영성과 선교에 대한 이해는 우리의 영성 생활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나 자신과의 관계,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 그리고 교회 공동체 속에서의 관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상 속에서 우리가 선교를 열심히 해야한다는 관점이다. 이것은 존재 중심적이다. 그러므로 신앙 생활의 한 부분 그 중에서도 가장 주변에 놓인 존재의 표현일 뿐인 선교 활동을 열심히 하는 것까지 이루어져야한다는 면에서 선교를 강조한다. 이러한 것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는 신학을 할 때에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하는 전통적인 신학의 영향에서 나온 것이다. 선교적 영성이란 이렇게 우리가 존재적인 관점에서 영성을 잘 갖추어야 하고 그 표현으로 활동으로써 선교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관점이 아니다. 선교적 영성이란 본질적으로 영성이란 선교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선교는 영성의 주변부가 아니라 선교가 아닌 영성은 없는 것이다. 영성이란 활동없이 존재적인 영성이 먼저 있고 그것이 선교 활동으로 표출되는 것이 아니라 선교가 영성이다. 선교는 영성에서 주변적인 것이 아니라 영성의 중심부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적 영성이란 우리의 존재적인 영성이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이고 그것의 표현으로서의 선교 활등에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는 신학을 할 때에 하나님의 존재에서 출발하여 하나님의 활동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는 하나님의 활동을 즉 하나님의 선교의 관점에서 신학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와 본질을 알 수는 없다.  단지 그분의 선교 활동을 통하여 그분을 알게 되는 것일 뿐이다. 존재보다 활동이 우선한다.물론 결국 우리의 신학과 영성에서 존재와 활동이 다 중요하다. 그러나 그 중심축이 기존의 신학과 영성에서는 존재에 관심을 주었다면 현대 선교 신학에서는 그리고 선교적 영성에서는 하나님의 활동하심과 우리의 활동에 관심을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 활동하심을 이해하고 우리가 그 활동에 참예함의 관점에서 신학을 하는 것이다. 물론 존재와 인격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의 중요성은 따로 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선교 활동의 기초이자 동기로서 중요성을 갖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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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3
    [오피니언] 어리버리 서목사의 낚시 전도법 - 불특정 다수에서 특정 소수로 (결론) 크리스천헤럴드2023.08.25
    우리는 위의 네 가지 카테고리만으로도 적지 않은 전도 대상자(태신자)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방법만으로는 여전히 한계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전도 대상자를 더 많이 발견하고 또 발굴하여 그들을 품고, 그들을 위해 힘써야 하므로 좀 더 적극적인 방법을 통해 사람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교회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전도는 기본적으로 성도 개개인이 하는것이지만, 교회적으로 전도하려는 성도들을 지원할 뿐만 아니라 교회로서의 태신자 발굴이 필요하다. 교회가 여러 가지 방법 중 단기적인 행사 혹은 외부 이벤트를 통해 태신자들을 발굴하여 기성 성도들에게 그들을 맡길 수도 있다. 앞에서 말한 기본적인 카테고리에 각자의 달란트와 은사를 통한 입체적인 방법을 추가하면 더 많은 사람(태신자)을 찾을 수 있다.예를 들어, 교회에서 풀타임으로 목회하는 목사들의 경우 교회는 위에서 열거한 방법에 많은 한계가 있을 수도 있다.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만나는 모든 손님, 혹은 동료가 다 교인들이다.그렇기 때문에 교인들에게 전도할 수 없는 상황에 노출되어 있다. 이런 경우는 직업을 통해서는 태신자 리스트를 작성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확장된 모델을 만들게 되면 얼마든지 추가로 태신자를 발굴할 수 있다. 목회자인데, 기타를 조금 친다고 가정해 보자. 교회 안에서 찬양 인도를 한다고 하면 이분의 경우, 기타를 가지고 얼마든지 확장된 모델을 만들 수가 있다.자신이 거주하는 아파트에서 기타 무료 레슨, 혹은 기타 동호회를 조직할 수 있다. 꼭 자신의 거주지가 아니어도 교회에서 기타 무료 레슨과 같은 클래스를 운영하면 교회 바깥 아이들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다. 이런 경우 일 년에 한두 번 학생들이 리사이틀을 통해 배운 실력을 자랑할 수 있고, 자신들의 친구나 부모들을 교회(다른장소)로 초청할 수도 있다. 이런 전도 모델은 개인과 교회가 함께할 수 있는 하이브리드형 전도 방법이 될 것이다. 아이들에게 기타를 무료로 지도하는 재능기부의 모양이지만, 이 일을 통해 얼마든지 다른 부모들과도 접촉이 가능하게 되기 때문에 얼마든지 태신자 발굴이 가능해지는 것이다.나의 경우, 운동하는 아들을 바래다주며 자연스럽게 그곳에서 많은 학부모와 만날 수 있고, 또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아침이면 커피를 사 들고 아침 먹거리와 함께 대접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혹자는 나에게 물을 수도 있다. 그래서 몇 명이나 교회에 전도했고 몇 명이나 교회에 등록했느냐고. 하지만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이지만 전도는 내가 출석하는 교회에 데려다 등록시키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다.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전도라는 것이다. 나는 거저 내가 처한 상황에서 나의 정성과 열정으로 사람들을 섬기고,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나의 섬김과 사랑의 표현은 오직 예수님 때문이다. 내가 굳이 내 돈을 써가며,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는 것은 내 개인의 사익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나의 시간과 돈을 써가며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다.많은 목회자의 관심이 주일 교회의 출석 인원과 등록 인원에있는 경우가 많다. 어떤 분들은 나에게 개척교회인 우리 교회의 상황을 물어보시곤 한다. 분명한 것은 낚시 전도법의 전도는 롱텀 프로세스(Long Term Process)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는 일은 꼭 사람의 머릿수와 똑같은 결과치로 나오지 않을 수 있다. 어떤 태신자의 경우 4~5년을 넘게 교제하면서도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들도 있다. 짧은 시간 여러분의 교회를 더 많은 사람으로 채우기를 원해 이 전도법을 사용한다면 결과에 실망할 수도 있다. 낚시 전도법은 교회 건물에 사람을 데려다 놓는 획기적인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하심을 전할 수 있는 기본적이고 현실적인 전략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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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2
    [오피니언] 샘신칼럼 - 바울은 어떤 충격을 받았는가? (행9:19-22) 크리스천헤럴드2023.08.25
     오랫동안 술을 좋아하던 사람이 어느 날 단번에 술을 입에도 대지 않고, 수십년 담배를 피던 사람이 갑자기 담배를 끊는 일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술을 먹지 않고 담배를 피지 않는 것은 그 사람에게 일어난 외적인 변화다. 외적으로 일어난 변화는 내적변화의 열매라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어느 날 우연히 종합검사를 받으러 병원에 갔는데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당신은 간암입니다. 술과 담배를 끊지 않으면 1개월을 넘기지 못합니다”라는 소리를 들었다면 어떻게 하게될까? 에이! 이미 망가진 몸 먹고 마시고 그냥 죽자 할까? 아마도 아무리 오랫동안 먹고 피던 술과 담배라도 살기 위해서는 끊게 될것이다. 이런 변화는 충격적인 변화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렇게 충격적인 인생의 변화를 경험한 사람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바울의 이야기다. 바울은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잡기 위해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다메섹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본문을 보면 다메섹에 도착한 바울은 완전히 달라져있었다. 그리스도인을 향한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던 바울의 모습은 사라지고 오히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음을 발견하게된다. 어떻게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바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기에 이런 충격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있었는가 말이다.다메섹으로 떠나는 바울의 모습과 다메섹에 도착한 바울이 이렇게 달라졌다면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바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이 분명하다.구체적으로 생각한다면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것이다. 다른 표현으로 말하면 주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표현 역시 구체적이지 않고 어쩌면 모호한 표현일 수 있겠다. 더 정확한 표현으로 말한다면 바울의 생각에 어떤 충격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러면 다메섹 도상에서 달라진 바울의 생각은 무엇일까?  우리가 그 사실을 확인하려면 다메섹에 도착했을 때 바울이 한 행동을 보면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생각의 변화는 그에 따르는 행동을 낳기 때문이다. 다메섹에 도착한 바울은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증거한다. 하나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과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 전의 바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생각했다. 바울은 예수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고 사칭한다고 믿었었지만 이제는 사칭이 아니요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다시 말해 바울의 생각, 지식, 지각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바울의 생각을 바뀌게 한 것일까? 바로 주님의 부활이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은 부활한 주님을 만나던 것이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구약 말씀을 너무나도 잘 알았던 바울이었기에 바울에게 있어 나무에 달려 죽은 예수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이요 사기꾼이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니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임이 증명했던 것이다. 이런 바울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내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내적변화란 생각의 변화이다. 만일 우리의 생각이 달라진다면 행동의 변화 역시 반드시 따르게 되어 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생각이 달라질까? 여기서 말씀과 성령님이 등장한다.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켜 주셔야 한다.  하나님을 그 일을 어떻게 행하실까?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통해 일 하신다. 다시 정리하자면 성령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이해시키시며 생각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도 바울처럼 달라질 수 있다. 문제는 우리에게 생각의 변화가 없다는 것인데 바울은 간증하기를 "매일 새롭다"고 했다. 바울은 매일 매일 달라졌던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성화라고 말한다. 성화의 은해가 우리 모두의 삶속에 오늘도 그리고 매일 매일 일어나 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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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1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소통은 의미부여이다 크리스천헤럴드2023.08.25
    LA 경찰(LAPD)가 약 30년 만에  9,000명이 되지 않고 3년 동안 1,000명이 감소하였다는 뉴스가 있었다. 이미 10여 년 전부터  신규 지원자가 줄어들다가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 사망 사건 이후 Black lives matters 운동으로 경찰에 대한 인식이 나빠졌고 예산도 삭감되었다. 그래서 경찰 인력을 줄어들면서 그 결과 범죄 발생은 많아지니 치안이 불안해졌다.이에 놀란 시장과 의회가 나서서 경찰 수를 늘리고 기존의 경찰들을 머물게 할 방법으로 연봉을 올려주는 등의 여러 가지 방책들을 내놓고 있지만 경찰 수는 더 줄어들고 있으며 몇 년 내 더 많은 경찰들이 퇴직과 사직으로 직업 변경의 계획이 있다고 한다. 물론 신규 보너스 제공과 연봉을 올리는 경제적인 부분도 문제이지만 핵심은 시민들의 안전을 위하여 봉사하던 자긍심이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내놓는 여러 가지 방안들이 대부분 경제적인 부분에 맞춰져 있어서 안타깝다.교회도 목회자들이 점점 부족해지고 있다. 신학교 지원자들이 현격히 줄어들었고 신학교는 졸업 학점을 줄이면서 생존을 위하여 애쓰고 있지만 이미 인구 절벽이 시작되었고 코로나를 거치면서 교회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고 몇몇 목회자들의 여러 범죄가 매체를 통하여 드러난 후 더욱 목회자 수급은 더욱 큰 문제가 되고 있다. 특히 극소수의 대형교회 목회자 외에는 많은 경우 목회자들이 생계를 위하여 다른 일들을 해야 할 정도의 상황에서 목회적인 자긍심마저 무너지면 목회자들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그런데 안타깝게도 어느 정도 경제력이 있는 교회들조차 목회자의 생계에 대하여 너무나 무책임한 모습을 보이고,  몇몇 교인들은 목회자가 특별한 잘못이 없는데도 서슴없이 비난하고 상처를 주는 말을 내뱉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예전에 그런 식의 말을 하면 어떤 의식이 있는 사람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새로운 세대가 되었다. 새로운 세대는 합리적이지 않고 근거없는 비난이나 비판에 동조하지 않는다. 그러면 젊은 세대는 점점 교회를 떠날 것이고 그 현상이 이미 많은 교회들에서 나타나 나이 든 교인들이 대다수인 상황이 낯설지 않게 되었다.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목회자가 되었지만, 경제적으로 가정을 돌보지 못하는 죄책감과 교인들에게 받는 상처로 과연 이 길이 맞는가에 대한 회의를 하게 된다. 그러면 목회자는 교회를 떠나고 그 교회는 그렇게 목회자들이 떠나는 일이 반복되다가 결국에는 목회자가 없는 교회가 될 것이다.목회자들에게 가난이 미덕인 것처럼 생각되던 때가 있었다. 그 때는 대부분의 교인들이 가난하고 다들 먹고 살기 힘들던 때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도 함께 그 환경에 동참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 교인들은 나름대로 살만하고 여유도 있는데 목회자들에게만 과거의 기준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기준을 내세운다면 너무나 이기적인 태도이다.교회에 젊은 세대가 없다고 아우성인데 조금 있으면 목회자도 부족할 수 있다. 이미 조금씩 그 현상이 드러나고 있다. 교회가 살아나고 다음 세대가 회복 되려면 여러 가지 방안을 마련해야겠지만 우선 목회자의 회복이 우선이다. 교인들은 목회자의 가치를 인정하여 지지해 주고, 함께 동역자가 되어야 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비전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그 때는 살아나고 교회를 위하여 생명을 내놓을 것이다. 교회는 담임목사 뽑는 광고하면 수십 명씩 지원하고 그 중에 심사하여 필요한 사람을 선택하는 것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위기 의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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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0
    [오피니언] 조영석 목사의 생각하며 기도하며- 가이드 크리스천헤럴드2023.08.13
    한국으로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자주 가기 어려운 먼 곳이고 비용도 많이 드니 가서 최대한 많이 보고 경험하도록 철저히 준비를 하고 갔다. 비행기표 구매와 호텔예약은 이미 여러 달 전에 마쳤고, 떠나기 한달 전에는 가볼 곳들, 먹을 것들, 구경할 것들, 지하철 노선과 버스와 기차표도 미리 알아보고 예매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다.정해진 시간 안에 모든 일정을 마쳐야 하니 스케줄도 효율적으로 짰다. 동선을 따라 여행할 곳을 정하는 것도 막상 가보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된다. 시간과 교통비를 줄이고 힘도 아껴, 같은 시간 안에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이 모든 준비를 해야 하니 가이드가 사전에 해야 할 일이 제법 많다.이렇게 세심히 준비를 해도 막상 가보면 여러 변수가 생긴다.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 생길 때도 있고 날씨가 변덕스러울 때도 있다. 예를 들어 놀이동산에 가기로 한 날 비가 많이 내리면 일정을 변경해야 한다. 날씨 확인을 했음에도 수시로 변한다. 그러나 인솔자에게 가장 큰 도전은, 이런 힘든 준비과정이나 예측하지 못한 현장의 변수가 아니라, 바로 따라오는 사람들이다. 긴 시간 비행기를 타고 생체리듬의 시간이 반대인 곳에서 진행되는 여행의 시작은 지친 몸과 마음이다. 여행으로 들뜬 마음은 피곤함에 수그러들고 쉬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관광보다 숙소에서 늘어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이로 인해 첫날부터 여행 계획이 틀어질 위기를 맞는다. 모두가 내키지 않는데 지친 몸을 일으켜 따라 나서게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그렇다고 상황과 컨디션에 따라 여행 계획을 바꾼다면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여행의 목적이 최대한 많이 보고, 배우고, 느끼는 것이라면 인내와 수고는 감수해야 한다. 걸어야 하고 이동해야 한다. 덥다고 하루 종일 그늘 아래 앉아 있을 수 없고, 비가 온다고 방 안에만 있는다면 여행을 할 수 없다. 가야 볼 수 있고, 겪어야 경험할 수 있다. 가장 큰 실수는 상황에 따라 쉽게 계획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당시에는 반응이 좋고 몸은 편해도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아무런 추억이 없다.편안하고 안락한 여행이 되게 하는 것도 가이드가 할 일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할 일은 여행동안 최대한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게 해주는 것이다. 고생이 되어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좋은 여행이 된다면 당시의 수고는 잊혀지고 좋은 추억만 남는다. 가이드가 할 일은 이 고비들을 잘 넘겨서 계획을 끝까지 완수하는 것이다. 지치고 피곤하면 불평할 수 있다. 여행이 싫어서가 아니라 잠시 힘들어서 그럴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가이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때마다 독려하며 잘 따라오도록 설득한다.가이드는 모두의 의견과 요구를 들어주는 것도 경계한다. 저마다 생각과 의견이 분분하다. 모두의 요구를 들어주고 그때마다 계획을 바꾼다면 차질이 생긴다. 다양하고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것이 여행이다. 관심이 없었던 경험을 하고나서 생각이 바뀌어 새로운 관점으로 보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지혜로운 가이드는 일시적인 반응은 지나가게 내버려두고 중요한 계획을 수행해 나가는 것에 목적을 둔다.그러니 여행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이 모든 계획은 가이드에게 맡기고 그가 인도하는 대로 가고, 보고, 경험하면 조금 힘들고 고되어도 많은 것을 배우는 좋은 여행을 하게 된다. 그 결과를 위해서 가이드가 철저히 준비를 한다. 여행이 끝나면 왜 이곳에 갔는지, 왜 이런 계획을 세웠는지 알게 된다. 가이드를 믿고 따르는 것이 좋은 여행을 위한 가장 현명한 결정이다.우리 인생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따르는 과정도 다르지 않다. 나를 위해 가장 좋은 계획을 세우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내가 꼭 경험하고 가야 할 길로 인도하신다. 나의 인생이 풍성한 삶이 되도록 꼭 필요한 것을 보고 배우고 깨닫게 하신다. 하나님은 열심을 다해 이 모든 것을 준비하신다.그러나 그 과정은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를 때가 많을 것이다. 내가 원치 않는 경험도 있고, 가기 싫은 곳도 있을 것이다. 피하고 싶은 힘들고 고된 과정도 있을 것이다. 이때 포기를 하면 하나님이 나를 위해 예비하신 계획과 목적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하게 된다. 나를 위해 준비하신 과정을 모두 마치고 나서 알게 될 하나님의 뜻과 놀라운 결과를 볼 기회를 놓치게 된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고, 힘이 들어도 끝까지 가야 한다. 그곳에 도달해야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날 가족 모두 아빠가 가이드 하느라 수고했다며 박수를 쳐줬다.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면서 힘들고 불만도 있었지만 지나고 보니 참 좋은 여행이었다며 고마워했다. 다음에 다시 가족 여행을 떠날 때 이번의 경험이 신뢰가 되어 아빠를 믿고 또 다른 여행을 따라나설 수 있게 된다. 어찌보면 이것이 함께 여행을 떠나는 가장 큰 목적일지도 모른다. 여행만큼 동반자들을 가깝게 하는 게 없다.우리 가족은 같이 여행을 다녀온 후 한층 더 가까워졌다. 서로에 대해서 더 알게 되었다. 함께 보고 느끼며 공감한 것들이 생겼다. 같이 걷고 고생하며 서로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생겼다. 여행에서 돌아와도 오랫동안 함께 간직할 추억과 나눌 이야기가 생겼다.하나님을 따라가는 것도 같다. 가다보면 예비하신 길로 인도하신 이유를 알게 된다. 결과를 보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다. 이 경험이 신뢰가 되어 나를 더 멀고, 긴 여행으로 인도하실 때도 믿고 따라 나서게 된다.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요한계시록 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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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아모스 목사의 일터영성 - 정답 보다는 공감이 필요합니다 크리스천헤럴드2023.08.13
    얼마전 ‘라이프 코칭’ 이라는 이름의 모임을 인도 하던 중, 참여한 젊은 자매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자신이 지금 너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데, 자매의 어머니가 위로의 명목으로 다가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 의도치 않게 큰 싸움을 하고 말았다고 눈시울을 붉히더라.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으니, 처음엔 모든 일이 잘 될거라는 이야기를 해 주시다가, 갑자기 자매를 향해 지금 너가 겪고있는 아픔은 따지고 보면 그 문제 때문이라기 보다는 너에게 감사함이 부족하기에 찾아온 현상이라고 하셨단다.그러면서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네가 감사할 일들을 찾아서 그것들에 감사하기 시작하면 곧 네 안에 있는 염려와 걱정이 사라질것 이라고 하셨다며,왜 우리 엄마는 나의 어려운 상황에 공감해 주시지 않고 정답을 강요하시는지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을 하더라는.지금 이 시대는 ‘경청’을 하는 사람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저마다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로 넘치는 시대라 할수 있겠다.사실은 목회자 직업군에서 이런 사람들이 특히 많음을 보게 된다.많은 이들이 목회자를 찾아와서 상담을 하고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정답이 필요해서라기 보다는 누군가가 나의 아픔과 어려움을 알아주고 공감해 주기를 바래서 찾아오는 것인데, 많은 목회자 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다 듣기도 전에, 듣는 중에도 끊임없이 어떤 정답을 얘기 해 주는 것을 고민하는 경우를 보게된다.하지만 정말 그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것은 가르침을 받는 것 보다는 정성을 다해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것 이라는 사실을 명심했으면 좋겠다.복음서에서 보여지는 예수님의 사역도 많은 부분 경청과 공감의 사역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여러 곳에서 가르치시고 고치시는 사역들을 하셨지만, 예수님은 언제나 낮고 천한이들, 소외되고 주목받지 못하는 사람들 곁에 계셨고, 학교나 클래스를 만들어 그들을 교육하시는 사역을 하신 것이 아니라, 그저 그들과 함께 어울리시면서 그들의 삶을 삶으로 공감해 주셨음을 기억해야 한다.물론 그렇게 삶으로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예외없이 삶이 좋아졌음을 우리는 안다.경청은 사랑이다. 사랑이 없으면 경청할 수 없다.깊이 듣는 대화를 하면 상대방은 자신의 감정을 수용해 준다고 느끼게 되며, 자신의 감정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서로의 관계를 돈독히 하게 된다. 상대방이 자신을 이해해 준다고 생각될 때 서로에 대해 신뢰감을 갖게 되고, 사랑의 관계가 형성된다.바꾸어 말하면, 사랑의 관계에 있는 사람과 대화를 하게 된다면, 말하기 보다 듣기에 초점을 맞추고 마주 앉아야 함을 잊지말자.예수님을 닮아간다는 말은 예수님 처럼 살겠다는 말인데, 경청은 그 삶의 핵심 중에도 핵심임을 잊지 말자.진정으로 듣는것이 사랑이요, 사랑하지 않으면 결코 들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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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샘신칼럼 -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이유와 우리에게 남은 희망” 크리스천헤럴드2023.08.13
    만일 이 시간 우리에게 죽음이 찾아 왔다고 한다면 과연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무엇일까?지금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난 그 시간부터 죽음 이라는 그 날을 행해 한거름 한거름 걸어가고 있다. 그 어느 누구도 피해 갈수 없는 것이 죽음 이다.내가 죽음 앞에 서 있을 때 돈과 권력과 명예, 그리고 사람들이 나를 도와 줄 수 있을까?없다. 그 모든 것이 죽음 앞에는 무력해진다. 그 동안 그렇게 움켜쥐고 살았던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지는 순간이다.죽음이 정작 다가온다면,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들은 과연 무엇이 있을까? 그 순간은 삶의 의의와 목적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는 시간이 될것이 분명하다.지금까지의 삶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심사숙고하게 될 것이다. 죽음이 다가올 때, 우리는 소중한 순간들과 가족, 친구, 연인들 과의 관계에 더욱 감사하고 높게 평가하게 될 것이다. 그동안 소홀히 살았던 인연 들과의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우리 삶의 근간이 되는 사랑과 연결을 더욱 깊이 느끼고 싶어할 것이다.  죽음이 다가온 시점에서는 후회되는 점들이 있을 수 있다.그러나 곧 그 모든 후회를 극복하고, 자신과 타인을 용서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우리는 삶의 긴 여정에서 어떤 실수를 저질렀더라도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죄를 품지 않는 자비로운 마음가짐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미래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게 되는데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하고, 가족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나 생전 후원에 대해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삶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어떻게 사랑과 배려를 표현하며, 우리의 유산이 세상에 어떻게 남을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영적인 탐구와 신앙적인 신념이 더욱 중요해진다. 존재의 의미, 영원한 세계에 대한 탐구,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진지한 탐색이 필요하게 된다.이렇게 영적인 차원에서도 우리는 더 깊이 탐구하고, 신념을 강화하며 내면적인 위로를 찾을 수 있겠다. 죽음의 직면은 우리에게 삶의 소중함과 감사함을 더욱 깨닫게 한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에 대해 감사하며,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이 순간은 우리에게 삶의 가치를 새롭게 다시 발견하고, 더욱 깊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계기가 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는 진실해 진다. 그리고 알게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이 참으로 바보처럼 살았다는 사실이다. 속고 살았다는 말이다. 중요하지 않은 것을 붙잡고 살았음을 죽음 앞에 와서야 깨닫는다면 너무나 늦은 것이다. 분주한 사람은 자기의 시간을 다시 배치해야 한다. 이 사람 역시 자기의 시간을 다시 배치한다.그런데 시간을 배치함에 있어서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죽음이었다.그는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내가 죽었을 때 울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그리고 그들을 위해 가장 많은 시간을 사용할 것을 결심한다.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죽음이 찾아온다면 주님 밖에 의미가 없다. 죽음이 찾아오면 모든 것은 사라지지만 주님은 그곳에 계신다. 죽음 앞에 설때 우리는 깨닫게 될 것이다. 그 동안 우리가 추구하며 살았던 그 모든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이었는가를 말이다.  누구를 미워하는 것 역시 의미가 없다. .죽음 앞에서 더 빛나는 분이 예수님 이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이다.돈과 권력이 죽음 앞에서는 의미가 없지만 부활은 죽음 앞에서만 의미가 있다. 죽음이 있기에 부활은 귀하고 의미가 있는 것이다.주님의 부활이 감격으로 다가오려면 죄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고,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부활은 죄와 죽음의 건너편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죄와 죽음의 성경적 의미를 아는 사람만이 부활의 진정한 가치를 알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주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며, 주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 믿는 사람들이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이다.이 말을 뒤집으면 부활이 사실이라면 우리 믿는 사람들이 가장 복 받은 사람들이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 주님의 부활은 사실이며, 우리의 부활 역시 사실이다.어느 날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가장 복 받은 사람임을 확인하는 날이 올 것이다. 우리가 죽음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부활을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부활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려면 죽어야만 한다. 만일 우리의 육신을 십자가, 죽음에 넘기운다면 부활의 능력을 경험할 것이다. 죽음과 부활은 항상 같이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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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고 박희민목사 광복절 특집-그리스도인과 애국 (2) 크리스천헤럴드2023.08.13
    에스더는 자기 동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내가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왕께 나가서 위기에 처한 동족을 구해내는 것을 우리가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신학시대 들어와서도 바울도 로마소쿠장에 보면, 내게는 형제 코둑을 위한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말이에요. 형제들을 복음으로 구원하기 위한 고민이 자기에게 있다고 고백을 해요. 또 예수님도 예루살렘 도성을 바라보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하고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셨던 것을 성경에서 읽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크리찬의 삶이라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줘요. 우리 한국의 근대사를 봐도 정말 우리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 계몽을 위해서 앞장서서 투쟁하고 헌신했던 사람들이 크리스천들이예요. 예를 들면, 독립선언문에 서명했던 34 면 중에 열여섯 명이 이승훈 선생을 위시해서 열여섯 명이 크리스찬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승만 박사 도산 안창호 선생 박용만 선생 또 안중근 의사 유관순 열사 모두 크리스찬이었어요. 이것을 무엇을 말하느냐 참 신앙인은 자기 혼자만을 위해 사는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는 거예요. 자기가 속한 민족 공동체를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정말 기도하고, 섬길 수 있는 삶이 크리스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노력에는 한계가 있어요. 한번 재난이 일어나고 지진이 일어나고 태풍이 불면 우리 인간의 노력은 하루아침에 수포로 돌아가요 이번 코로나를 통해서도 우리 인간의 계획과 생각이 얼마나 참 힘없는가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아주 절감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해요. 하나님의 축복이 필요해요. 하나님의 도움이 우리에게는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시편 기자는 127편에서 뭐라고 말해요.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으면 집 짓는 자의 수고 가 헛되고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으며 헛되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가을에 풍성한 열매가 맺혀지기까지는 농부의 수고만으로는 역부족이에요. 햇빛을 하나님에 비춰주시고, 또 자라게 하시고 열매 맺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축복이 필요해요. 풍성한 열매는 농부의 수고의 열매도 되지만은 하나님의 은총의 열매 축복의 열매인 거예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워터루에서 불란서의 나폴레옹 장군과 또 영국의 월톤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전쟁을 치루었습니다. 모든 세상 사람들은 나폴레옹 장군이 승리할 것으로 내다봤어요 근데 그날 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완전히 예상을 되었고 영국에 월톤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승리를 거두게 돼요. 빅토 휴고란 분이 유명한 글을 남기게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밤사이에 몇 방울의 비를 내려서 인류 역사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으셨다라고 했지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으면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해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에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해야 돼. 우리의 죄 우리 민족의 죄를 회개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에레미아 33장 3절에 보면, 환난 날에 내게 부르짖어라 내가 응답하겠고 내가 알지 못하는 크고 큰 비밀을 보여주리라고 말씀해요. 그러므로, 우리는 광복절을 맞이해서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입니다. 한 개인과 한민족의 흥망성세를 좌우하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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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샘신칼럼 - "천국의 문을 열어주는 포도원 비유: 욕심과 사랑 사이의 선택" 크리스천헤럴드2023.08.13
    예수님이 마테복음 20장에서 말씀하신 포도원 이야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말씀이다. 그러나 잘 알려진 말씀 일 수록 아이러니하게도 내용은 알지만 의미는  모르는 경우가 있다. 본문 포도원 비유의 말씀이 그러한 말씀 중 하나다. 선입견 없이 이 말씀을 다시 묵상할 필요가 있다.  비유란 비교를 통해 청중에게 무엇인가를 교훈하는 것이므로 무엇이 비교되는지를 살펴보고 무엇을 가르치시고자 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주님은 포도원 비유를 통해 천국을 가르치시고 있다.다음 두 가지를 생각해 보자. 첫째는 주님은 본문 말씀의 일차 청중과 오늘 본문 말씀을 읽는 우리에게 천국을 알려주시고자 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천국을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이 말씀의 배경은 베드로의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마19:27)의 질문에 대한 답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주님이 생각하시는 천국과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이 다르다는 것이다.주님은 천국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포도원 비유의 말씀을 하신다.주님이 말씀하시는 천국은 죽어서 가는 장소도 아니요 우리가 가서 머무는 맨션도 아니며천국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이 어떻게  통치하시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천국을 알려면 천국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우리는 이 비유를 통하여 포도원 주인과 먼저 온 사람이 비교가 되고, 또한 먼저 온 사람과 나중 온 사람이 비교가 되고 있음을 알수 있다.그렇다면 주님이 소개하시는 천국은 어떤 곳인가? 제일 먼저 확인해야 할 천국의 모습으로 천국은 하나님의 주권이 이루어지는 곳이라는 것이다.  주님은 먼저 온 사람이 나중에 온 사람과 같은 데나리온을 받은겟에 대한 원망에 대해 말씀으로 책망한다.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마20:13-15)그렇다. 천국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요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곳이다.즉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한다면  지금 여기서 우리는 천국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님이 소개하시는 천국은 또 어떤 곳인가?  은혜의 법칙과 행위의 법칙이 공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먼저 온 사람을 통해서는 행위의 법칙이, 나중 온 사람을 통해서는 은혜의 법칙이 작동하고 있다. 세상은 철저하게 행위의 법칙이 적용되는 곳이지만 천국은 1시간만 일을 해도 12시간 일을 한 사람과 똑같이 받을 수 있는 은혜의 법칙이 적용되는 곳임을 기억해야 한다. 먼저 온 사람의 마음은 원망으로 인해 마음에 천국이 없는 사람의 모습을 본다. 먼저 온 사람의 마음속에는 시기, 질투, 원망, 비난, 피해의식, 비교의식 등이 가득했다. 반면에 나중 온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을 수 있을까? 은혜와 감사다.우리의 마음속은 어떠한가?  구원받은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도 천국이지만, 천국은 우리가 이 땅에서도 경험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포도원 비유를 통해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할 중요한 진리가 한가지 더 있다,그것은 우리의 행위가 투자인가 아니면 베푸는 것 인가 를 확인해야 한다. 투자나 베푸는 것인가는 외적으론 비슷해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보면 전혀 다른 것이다.투자는  자기를 위한 것이요 베푸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며 투자는 자기 욕심이라는 뿌리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베푸는 것은 사랑이라는 뿌리에서 맺힌 열매이다. 결국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은 욕심이 지배하면 지옥이며 사랑이 지배하면 천국이라는 것임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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