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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송경화교수 컬럼 "하나님에게 없는 것 한 가지" 크리스천헤럴드2022.05.10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다 하실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굳이 나를 부르셔서 이 일에 동참하게 하시는 걸까?하나님께서는 연약하고 아무런 능력 없는 우리를 사용하셔서 그 분의 일을 이루신다. 특히 상담의 장면에서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바로 내 눈 앞에서 생생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되는 때가 종종 있다.하나님과 함께 하는 상담사는 상담보다 기도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쓴다. 일주일 동안 내담자를 생각하고, 내담자를 위해 중보기도를 쉬지 않는다. 내담자의 상황과 아픔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기도를 하고 상담 시간에 내담자를 만나면 하나님께서는 상담사에게 할 말을 입에 넣어 주시기도 하고 상담사의 마음에 평안을 주시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놀라운 것은, 상담사의 말 몇 마디에 내담자가 크게 감동하거나 무언가를 깨닫기도 한다. 또 일주일 사이에 내담자의 마음이 놀랍게도 평안해지고 고통이 경감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내담자에게 이전에는 몰랐던 자신감이 새롭게 차오르고, 이전과는 다르게 행동해 볼 수 있는 용기도 생긴다. 심지어 내담자 주변의 상황과 주변 사람들까지 극적으로 변화되어 상담 시간에 할렐루야를 외치게 되는 경우도 많다.이런 일을 겪고 나면 상담사는 “나는 아무 것도 한 게 없는데, 하나님께서 다 이루셨다”는 믿음의 고백이 절로 나온다. 그러면서 또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다 하실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굳이 나를 부르셔서 이 일에 동참하게 하시는 걸까?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학생인 상담 실습생들에게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종종 생기는 것을 본다. 그럴 때 내가 자주 하는 말이 바로 하나님에게 없는 것 한 가지이다.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있는데, 딱 한 가지 하나님에게는 없고 우리에게는 있는 게 있다. 그것 때문이다. 그게 무엇일까?그건 바로 몸이다. 이 천 년 전 잠시 하나님도 우리처럼 몸을 가지셨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짧은 생애 이후 주님은 이제 더이상은 몸을 가지고 우리와 함께 하지는 않으신다. 주님이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도 주님은 많은 일을 이루신다. 하지만 몸을 가지지 않으셨기 때문에 주님은 아파하는 그분의 자녀들 옆에 다가가서 그들을 따뜻하게 안아 주실 수 없다. 연민이 가득한 표정으로 친절한 눈빛으로 자녀들을 바라보실 수 없다. 힘들어하는 자녀들의 손을 잡고 힘있게 그들을 일으켜 세워 주실 수 없다. 그들에게 꼭 필요한 말을 그들의 귀에 또렷하게 들려 주실 수가 없다. 물론 하나님은 다 하실 것이다. 문제는 우둔한 자녀들이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는 데 있다.그러기에 주님은 몸을 가진 우리를 필요로 하신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상담사는 주님의 몸이 된다. 그래서 주님이 마음 아파하는 그 사람 옆에 함께 시간을 보내줄 수 있고, 주님의 사랑을 말해 줄 수 있다. 그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줄 수 있고 그에게 따뜻하고 친절한 시선을 전해줄 수 있다. 그에게 필요한 말을 그의 귀에 들릴 때까지 반복적으로 말해 줄 수 있다. 그래서 주님에게는 우리가 필요하다.치유와 회복의 능력은 주님에게 있다. 우리는 주님이 쓰실 수 있게 우리가 가진 것을 드리면 된다. 주님의 사랑 전달자가 되어 주면 된다. 그러면 모든 변화는 주님께서 이루어 주신다. 이것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상담자의 역할이다.송경화 교수월드미션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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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병학목사 컬럼 “소통은 중심 잡기이다” 크리스천헤럴드2022.05.10
     교회는 중심을 잡아야 한다. 그 중심은 울고 있는 형제자매의 눈물을 닦아 주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다. ‘빈 무덤 신학’을 확립해야 한다. 이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빈 무덤 앞에서 다시 한번 더 각오하고 결단해야 한다대부분의 사람들이 연말 연초에 새로운 소망을 품는다. 새로운 대통령이 뽑히면 국민들이 살기 좋은 더 좋은 나라에 대한 소망을 품기도 한다. 그래서 국민들의 소망을 풀어줄 것 같은 사람에게 투표를 하고 그 결과 정권이 바뀌기도 한다. 자녀를 낳으면 자녀에 대한 소망과 기대를 품기도 하고 새로운 직장과 학교에 들어갔을 때에도 결혼을 하여 새 가정을 꾸렸을 때에도 소망을 품는다.그리스도인들은 기도 제목을 작성하고 교회에 제출하여 목사님이 기도해주기를 원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소망이 세상 사람들이 품는 소망과 무엇이 다를까. 더 채움 받고 더 쌓아 두고 더 풍요롭기를 원하는 소망을 기도하는 것 아닌가. 교회도 이런 소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미 좋은 건물이 있고 많은 교인들이 있고 훌륭한 프로그램이 있지만 도무지 그 갈증이 없어지지 않는 광야를 가는 사람들처럼 계속 더 원하고 원한다.그런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히려 모든 것을 비우고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셨다. 그 증거가 바로 빈 무덤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소망은 빈 무덤이다. 빈 무덤은 죽음을 통과한 후에 얻게 되는 결과이다. 죽음 없이 빈 무덤이 있을 수 없다.바울은 그 빈 무덤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고백하고 선포하였다.(로마서 1장 16절) 역설이다.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역설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 조차 그리스도의 빈 무덤을 말하기를 부끄러워 하였다.  빈 무덤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빈 무덤을 믿고 신앙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여기는 그리스도인들을 비웃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빈 무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기 때문에 오히려 자랑을 할 수 있었다. 빈 무덤은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다. 그러므로 빈 무덤을 그리스도의 부활로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 사람이 어느 민족 어느 인종이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다. 그것이 구원이다. 우리의 구원을 알려면 더 많이 가진 것 더 많이 쌓아 둔 것이 아니라 빈 무덤에서 시작해야 한다.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은 더 채워지는 것이 아닌 더 비워져야 한다. 더 채움 받으려 할 때 유혹이 있다. 그 유혹이 선악과를 따먹게 하였다.코로나가 아직 회복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더 좋은 영상과 음향 기기를 준비하고 더 나은 시설을 위하여 교회 리모델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어려운 교회들과 이웃들을 돌아보아야 한다. 아직 교회에 오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교회로 인도하는 계획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주님의 마음이 움직이면 교회가 계획하고 추진하는 것 보다 더 크게 채우실 것을 믿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설교 강단에서 항상 선포되는 설교 주요 주제가 아닌가. 교회는 적어도 선포된 설교만큼 살아야 한다.교회는 중심을 잡아야 한다. 그 중심은 울고 있는 형제자매의 눈물을 닦아 주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다. ‘빈 무덤 신학’을 확립해야 한다. 이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빈 무덤 앞에서 다시 한번 더 각오하고 결단해야 한다. 부활의 절기를 보내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적용해야 한다.그래서 교회는 주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주님이 교회를 기뻐하시면 주님이 역사하신다. 교회는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 주님이 교회를 통하여 역사하실 수 있게 해야 한다. 지금의 상황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눈과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헤아려 살펴야 한다. kim0409@gmail.com김병학 목사주님의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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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박희민 목사 지상설교 "무엇이 보이느냐?" (2) 크리스천헤럴드2022.04.26
     설교를 제대로 준비하는 목사들이라면 설교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자세는 물론, 삶의 철학, 세계를 보는 시각과 가치관 등이 담기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존경받는 목회자들은 자신만의 명설교들을 가지고 있다. 남가주 한인 기독교계에서 몇 안 되는 존경받는 원로로 꼽히고 있는 목사 중 한 명이 새생명선교회 회장 박희민 목사다. 박희민 목사는 1936년 충남 예산에서 출생했다. 에티오피아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1974년부터 남가주에서 목회했다. 1988년부터 나성영락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취임한 후 2004년 은퇴했다. 현재 새생명선교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무엇이 보이느냐?”라는 제목의 설교 두 번째다. (편집자 주) 눈먼 사람을 데리고 왔다사람들이 눈 멀어 보면 그 불편하고 비참 함을 알 수 있다. 그래도 이해가 안 되면 길을 가다 잠시 눈을 감고 백 미터만 걸어보자. 눈을 뜨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 인가를 곧 깨닫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눈먼 문제를 주님께 가지고 나와야 한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줄수 있는 분이다. 예수님 앞에 나오고 그를 만나면 우리의 눈이 뜨이게 된다. 주님을 바라보게 되고 문제가 해결된다. 상대방의 아름다움과 잠재력과 능력을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된다.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도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녀의 잃어버린 삶의 이상과 비전을 되찾았다. 어거스틴도 방탕한 삶을 살며 방황했지만 주님을 만났을 때 인생의 참된 꿈과 비전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는 과거의 죄된 생활을 청산하고 인류역사에 빛나는 훌륭한 영적 리더가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을 회심시키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감동을 주고 변화시키는 영향을 미쳤다.예수님은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눈에 침을 뱉으시고 안수해주셨다. 예수님이 우리 삶도 만져주셔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만져주심과 사랑이 필요하다. 주님은 그에게 무엇이 보이느냐? 고 물었다.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이 보인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시 한번 안수해주셨다. 예수님은 한 번에 완전히 고쳐  주실 수 있는 분이다. 하지만 왜 두 번이나 안수를 했을까?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치유사역을 보면 이곳에서만 두 번 안수를 해 주셨다. 이유가 무엇일까? 여기에는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교회에 출석하고, 예수를 믿는다고 단번에 주님을 밝히 보고 자신을 바로 바라보고 이웃과 세상을 밝히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장과 성숙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말씀과 성령의 역사 안에서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말씀 안에서 양육 받고 훈련을 받으며 교육을 받아야 한다. 바울은 빌립보서 3:12-14절에서 “내가 이미 얻었다함도 아니요 이루었다함도 아니요 오직 앞에 있는 표대를 향해 달려간다”고 고백했다.“다시안수 했을 때, 그가 주목하여 보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했다. 주님과의 만남의 경험이 더욱 깊이지고 깊은 진리의 말씀과 은혜 안에 잠기게 된 것을 말한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그믈을 던져라고 하셨다. 그가 순종했을 때 그믈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가 잡혔다. 우리는 신령한 눈을 떠서 진리의 세계를, 영적 세계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제는 인생과 사물의 외모만 보지 아니하고 그 중심과 핵심을 바라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주님을 만남으로 믿음의 눈이 뜨여질 때 세상이 다르게 보이게 된다. 피상적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사물의 핵심을 바라보게 된다. 사람을 대할 때도 그의 외모나 소유나 지위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중심과 그의 잠재력을 바라보며 가능성을 바라보게 된다. 그 속에 있는 온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없는 생명을 바라보게 된다.신령한 눈이 뜨이고 밝아질 때 자기 경험을 중요시 하거나 자기 지식을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더 중요시하게 된다. 사람은 떡으로만 살지않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며. 세상의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이며 아름답게 보인다. 주님의 사랑의 마음으로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봄으로 세상이 새롭게 보인다.  새 눈이 뜨여졌다.사물과 역사를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영안이 뜨여져야 한다. 영안이 띄여지게 될 때 우리의 가치관과 인생관 그리고 역사관이 달라진다. 삶의 이상과 비전이 달라진다. 고린도후서 4장 18절을 보면 “우리의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않는 것은 영원함 이니라”했다. 이렇게 우리의 가치관과 삶의 목적과 목표가 달라진다. 생각이 달라지고 말이 달라지고 행동과 삶이 달라지게 된다. 새로운 자아상을 갖고 살아가게 된다. 오늘 분문 뒤에 보면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것을 예언하자 베드로가 그리하시지 말라고 애원하자, 주님은 베드로와 제자들을 향해 사탄아 물러가라거 책망하셨다. 왜냐하면 그는 육신의 눈과 지성의 눈은 떴지만 영안이 뜨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늘 교회의 문제가 무엇이냐? 사람들의 눈을 말씀으로 뜨게 해야 하는데 그것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오히려 눈을 멀게 하는 일을 할 때도 많다.H.G.웰스(H.G.Wells)라는 작가가 쓴 ‘The Country of the Blind(시각장애인들의 나라)’라는 단편 소설이 있다. 주인공은 높은 곳을 팀과 함께 탐험하다가 혼자서 절벽으로 떨어진다. 다행히 눈 쌓인 절벽이라서 겨우 살아남았다. 그런데 그 아래 마을은 전설의 마을이었는데 앞을 못보는 사람들만 사는 마을이었다. 주인공은 이들에게 “I can see.”라고 말한다. 이곳 주민들은 “see?” 처음 듣는 말이다. 결국 이 사람은 이상한 말을 하는 사람으로 간주 된다. 그리고 바위에서 튀어나온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직 덜된 존재라고 생각한다. 말도 더듬는다고 생각하면서 한마디로 개발이 덜 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결론을 내란다. 그래서 손을 꼭 붙잡고 안내를 한다.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보는 사람의 손을 잡고 안내를 하고 있다. 길을 가면서 주인공은 말한다. “I can see it(나는 볼 수 있다).” 이에 답변한다. “There is no such word as see(볼 수 있다는 말은 없어).이렇게 그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러다가 주인공은 그곳의 한 아가씨를 사랑하게 된다. 청원했는데 부모는 어리석은 자에게 자기의 딸을 시집 보낸다는 것이 너무도 싫었다. 그러면 이 어리석은 자의 지적수준을 높이는 방법이 없을까 고심하는데 그곳 의사가 기가 막힌 방법을 생각해 낸다. 주인공의 두뇌가 병이 들어서 어리석은 자가 되었는데, 두뇌가 이처럼 개발이 안 된 이유를 찾았다고 한다. 두뇌와 가까이 연결되어 있는 눈이 문제라고 말한다. 눈이 열려있기 때문에 두뇌에 손상이 왔다는 것이다. 이 눈을 빼어내면 두뇌도 좋아질 것이고 그러면 딸을 시집보내도 될 것이라는 충고를 한다. 주인공은 수술하는 날 아침 자신의 눈이 없어지는 날 아침 탈출한다. 어찌 보면 우스운 이야기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 소설이다. 보기 때문에 어리석은 자가 되고 있다. 눈을 빼야지만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 우리가 사는 사회라는 것이다. 하나만을 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둘을 보면서 살아간다면 당연히 어리석은 자라는 편견과 핍박을 받게 되어 있다. 이솝우화에도 두 눈을 가진 원숭이가 한 눈 가진 원숭이가 사는 마을에 가서 완전히 바보 취급받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디. 영안이 먼 사람들은 오히려 영안이 뜨인 사람들을 향해 어리석은 사람으로 취급을 할 때가 있다. 오늘날 교회도 눈먼 사람들이 판치니까 눈뜬 사람들이 오히려 바보취급 받을 때 많다.그럼 왜 눈이 멀어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고 주님처럼 영안을 떠서 바로 보지 못하게 되는 걸까?우리의 죄와 욕심, 이기심과 정욕 때문이다. 이 설교를 보는 모든 사람들이 영안을 떠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자신을 바로 바라보며, 이웃과 세상을 바로 바라볼 수 있는 삶의 은혜가 함께하기를 바란다. 오늘 본문의 장애인은 눈을 떠서 무엇을 보기를 원했을까? 주님이 그의 눈을 뜨게 한 것은 세상의 부귀영화를 바라보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바라보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실존을 바로 바라보기를 원하셨으며 세상을 바로 바라보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때 우리는 삶의 분명한 의미와 목적, 삶의 뚜렷한 소명과 사명을 깨닫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마을로 가지 말고 집으로 가라. 우리가 멀리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도 좋지만 가장 가까운 집으로 가서 우리 가정 안에 있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이 시급한 문제요 하나님이 기뻐 하시는 일이다. 우리 가정과 친척에 있는 잃어버린 영혼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역사가 함께하시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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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강제 정책, 낙태, 성교육, 실종되어 가는 ‘자유’ 크리스천헤럴드2022.04.26
    이런 식으로 정부가 강요한다고 하면 백신 접종 이외에 다른 이슈도 연방정부가 개인 사생활을 물론 자유 민주주의 사상과 삶까지 간섭하게 된다는 결론이다백신과 관련한 논쟁은 끝이 나지 않았을 때다. 백신에 대한 찬반이 팽팽하게 맞설 때, 인디애나 주에서 있었던 일을 소개한다. 태평양법률협회는 인디애나주에 있는 여러명의 간호사들과 의사들이 강제로 백신접종을 반대하는 일을 도왔다. 이들은 종교적 차원에서 반대하고 있었다. 협회는 이들을 도와 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인디애나주에서 일반인도 아니고 의료인들이 접종을 거부하고 나선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은 우리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는지 아니면 백신에 대한 부작용 때문인지 알려지지 않았다. 어떤 이유에서 백신접종을 거부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의료인들이 백신 접종을 거부하고 나선다는 것에 대하여 깊게 생각해 봐야한다. 협회에서 주장하는 것은 병원 자체가 의사나 간호사들에게 강제 접종을 요구한다는 것이 미국 헌법을 위배한다는 것을 지적했다. 즉 강제접종 정책은 위헌이라는 말이다. 만약 이런 식으로 정부가 강요한다고 하면 백신 접종 이외에 다른 이슈도 연방정부가 개인 사생활을 물론 자유 민주주의 사상과 삶까지 간섭하게 된다는 결론이다. 또 하나의 이슈는 낙태와 관련된 소식이다. 연방 대법원에서는 낙태와 관련해서 돕스(Dobbs) 대 잭슨 여성 건강 단체(Jackson Women’s Health Organization)의 법원 소송을 검토중이다. 미국 미시시피주의 낙태 법안과 관련해서 낙태를 15주 안에만 허용하는 것인데, 미시시피주는 임신 15주 이후에는 낙태를 할 수 없는 법안을 대법원에서 심의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만약 이것이 통과된다면 지난 수 십 년 동안, 적어도 거의 반세기 전에 합법화된 로대 웨이드(Roe v. Wade)에 치명적인 도전을 가져다 줄 것이다. 진보주의에서는 내일 당장 아이를 출산하는 과정에서도 산모가 원하면 얼마든지 낙태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제 이 법이 통과되면 진보적인 낙태정책에 치명적으로 타격을 입힐 것아다. 미국 남부 지역의 주들 가운데는 ‘심장 박동 법안’ 즉 여성이 6주만 되면 임신여부를 판단할 수 있어서 ‘심장 박동 법안’을 통과시킨 일이 있다. 물론 이것은 연방정부까지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다. ‘심장 박동 법안’을 지지하는 주에서는 임신 6주 이후에는 낙태를 할 수 없어 인근 다른 주에 가서 낙태수술을 하는 여성들이 급증하고 있다.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피임기구나 피임하는 것 자체도 비성경적일 뿐 아니라 윤리 문제에 찬반이 심했다, 그것보다도 더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태아의 심장이 뛰고 있는 상황에서 낙태를 생각하고 시행한다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떠나서 사회적 윤리에도 큰 문제가 된다. 때문에 낙태 시술에 대한 기본적 교육을 우리 자녀들에게 교육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공립학교에서는 자녀들에게 이러한 교육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모의 허락을 받고 낙태를 해야 하는데 공립학교에서는 가족계획연맹 즉 Planned Parenthood와 같은 단체와 협약해서 부모의 허락없이 소녀들이 낙태를 할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해 주고 있다. 또 공립학교에서는 Planned Parenthood와 협약해서 ‘성 교육’을 실시하는데, 이것은 윤리적 성교육에 중심을 둔 것인 아니라 어떻게 하면 성생활을 즐길 수 있느냐에 초점을 두고 있고, 또한 의사나 간호사가 성교육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인용품상 주인들이 나서서 성교육을 실시하는 아주 치명적인 일들이 공립학교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런 문제들이 하루아침에 해결될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당장을 고민하는 부모들에게 한 마디 조언한다면 ‘공립학교 성교육 클래스에서 자녀들을 빼내자’는 것이다. 자녀들을 클래스에서 빼내려면 협회에서 준비한 Option Out Form을 작성해 학교에 제출하면 된다. 이렇게 해야 GPA와 상관없이 아이들을 잘못된 성교육에서 보호할 수 있다.주성철 목사태평양법률협회 한국어 담당   <!--[if !supportEmptyParas]--> <!--[end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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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예수의 이름 크리스천헤럴드2022.04.26
     우리 신앙의 삶이란 이런 것들을 누리는 삶이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그 안에서 이런 귀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초등학교 때 교통반이라는 것이 있었다. 교통이라는 글귀의 완장을 차고 거리에 나아가서 교통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학교 앞뿐 아니라 좀 떨어진 곳에까지 가서 교통정리를 하고 오기도 했다. 아침에 일찍 학교에 가서 멀리까지 교통정리를 하고 오는데 끝이 나면 차를 얻어타고서 학교로 와야 했다. 어렸지만 교통이라고 쓰인 완장을 들고 흔들면 큰 트럭이 와서 서고 태워주어서 학교로 돌아오곤 했다. 그 당시만 하여도 차를 타는 것이 귀한 시절이고 아주 기분 좋은 일인데 그 교통이라는 완장을 흔들어 큰 차를 세울 때면 아주 어깨가 으쓱하고 기분이 좋았다. 비록 작은 어린아이에 불과했지만 학교와 경찰서에서 발급해 준 교통이라는 완장 때문에 트럭이 서서 태워준 것이다. 그 완장은 경찰서와 학교의 권위를 담고 있는 작은 표시였다.우리는 나약한 인간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의 연약한 손에 아주 귀한 완장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라는 이름이다. 보잘것없는 존재지만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가 예수라는 이름을 통하여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 이름이 소중한 것이다. 그까짓 교통 완장 하나 가지고도 어깨가 으쓱해지는데 하나님의 권세를 담고 있는 예수 이름은 얼마나 귀하고 위대한 이름인가?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형상에 따라서 우리를 지어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존귀한 존재이다. 뿐만아니라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귀한 신분을 회복해 주셨다. 그런데 그것이 다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더 큰 선물을 주셨다. 바로 ‘예수’라는 이름이다. 하나님 나라와 권위를 누릴 수 있도록 그 귀한 이름 ‘예수’를 값없이 주셨다. 마치 시골의 꼬마 어린이가 교통이라는 완장을 차고 경찰서와 학교의 권세를 누리듯 예수 이름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권세를 누릴 수가 있게 됐다. 요한복음 16:23-24절은 이 점을 우리에게 잘 말해주고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귀한 이름 예수를 주신 것은 기쁨이 충만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이름 예수를 가지고 기쁨이 충만한 삶을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도하신 삶은 충만한 삶이다. 생명과 사랑, 기쁨과 즐거움, 열매와 성취, 깊이와 의미, 용서와 화해, 이런 것들이 충만한 삶을 우리에게 의도하셨고 그것을 위하여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도록 허락하셨다. 우리 신앙의 삶이란 이런 것들을 누리는 삶이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그 안에서 이런 귀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혹시 결핍으로 인하여 고통스러운가? 삶의 문제로, 인생의 고난으로 지쳐있고 마음이 상해 있지는 않은가? 여기 우리 손에 귀한 이름이 주어져 있다. 두려움과 걱정이 지배하는 삶이 아닌 갈등과 소외에 눌려 사는 삶이 아닌 풍성한 삶, 기쁨의 삶, 생명의 삶이 예수 이름 안에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우리의 걱정과 근심, 두려움과 좌절을 모두 예수의 이름 위에 내려놓자. 우리의 꿈과 소망 그리고 우리의 바람을 예수의 이름 위에 내려놓자. 그 이름은 하늘의 보좌를 움직이는 이름이다. 그 이름은 하늘 나라의 권위를 담은 이름이다. 그 이름은 영원하신 우리의 하나님의 이름이다. 많은 경우에 걱정과 두려움이 지배하는 삶을 살아간다. 삶이 이런 것들로 찌들어 있다. 남들이 보기에는 부러운 삶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많은 걱정 속에 살아간다. 이루어지지도 않은 것을 미리 걱정한다. 걱정해도 소용없는 일들을 걱정한다. 걱정 때문에 걱정하고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 손에 쥐어져 있는 예수의 이름을 보지 못한다. 예수의 이름으로 걱정을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우리는 걱정이 아니라 평안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인간은 죄악으로 인하여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간다. 죄에 이끌려 다니고 살아가고, 죄의 마땅한 값을 받고 살아간. 그래서 정죄와 죽음의 삶을 살아간다. 나는 이렇게 살아 마땅하다는 정죄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손에 쥐어져 있는 예수의 이름을 보지 못한다. 예수님께 우리의 죄악을 고하여 드리고 죄의 정죄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은 정죄가 아니라 용서이고 화해이다. 예수의 이름 안에 용서가 있고 화해가 있다. 삶의 환경들로 인하여 마음의 소망을 포기하고 살아간다. 그래서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 살아간다. 그래서는 안된다. 손에 쥐어진 예수의 이름이 있다. 그 이름으로 구하면 하나님께서 꿈과 소망을 이루어주신다. 미리 포기하고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소망을 선택한 삶을 살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그 이름을 통하여 충만하고 새로운 삶을 누리도록 해야한다. 그 이름을 누리고 전해야 한다. “오직 예수”를 전해야 한다. 그 이름이 어떤 종교지도자의 이름이기 때문이 아니고 그 이름이 어떤 위대한 사상가의 이름 때문인 것도 아니고 바로 그 이름은 참 생명과 소망과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그 권세를 누리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한다.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도록 인도해야 한다.신선묵 교수월드미션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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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부활하신 예수님 크리스천헤럴드2022.04.26
     카카오톡 아이디 kimbg1212로 연결하시면 메일 카톡으로 말씀을 묵상할 수 있는 큐티자료를 보내 드립니다.기독교가 유대교에서 결정적으로 다른 신앙의 공동체로 출발 할 수 있었던 것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뿐만 우리의 몸의 부활도 믿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신앙은 다른 종교와 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예수님을 따르던 여자들이 시체에 바를 향품을 준비해서 예수님이 묻힌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 이유는 안식일 때문에 시신이 대충 수습이 되었기에 제대로 마무리 하기 위해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무덤 앞을 막아 두었던 돌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예수의 시체는 그곳에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훔쳐 갔을지 모른다고 근심하였습니다. 그 순간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여자들은 두려워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두 천사가 여자들에게 죽음과 부활을 미리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럼 예수께서 지금 다시 살아있는 자라는 말인데 그는 누구라는 말인가? 또 이는 무슨 의미인가? 그리고 다시 살아나실 것이면 왜 예수께서 죽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살아 있는 자는 초자연적 하늘의 생명으로 ‘살다’를 의미합니다. 그는 죽은 자 가운데 다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습니다(롬1:4) 예수께서 세상에 계시는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을 아무도 의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그리고 그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는 섬기는 자로 오셨습니다.(막10:45) 그는 단순히 섬기는 자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으셔야 하는 필연성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여인들은 천사들 “그가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라는 이 말씀을 기억하자 새로운 부활 생명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믿음은 말씀을 경험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은 영이요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전에 자신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1:25) 그 부활의 생명의 실제를 경험하였습니다.그 여인들은 예수의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바로 빈 무덤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그에 대한 설명을 천사를 통해 두 귀로 들었며 예수 부활의 생명을 경험한 후 확실한 증인이 되었습니다.그래서 큰 기쁨으로 달려가 제자들에게 이 부활의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증인들의 말을 들었지만 ‘말도 안 되는 이야기’ 또는 ‘의식이 희미해진 환자의 헛소리’처럼 여겼습니다. 맞는 반응입니다. 몸이 다시 부활하여 시공을 초월하여 다닌다는 이야기를 믿는 것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으로 확실히 일어난 사실입니다. 만일 예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기독교는 지금까지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생명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눈으로 보았고 귀로 들었고 자세히 보고 손으로 만져보았다고 증언했습니다.(요일 1:1) 그리고 그는 우리를 가두고 있는 무덤에서 돌을 굴려냅니다. 지금 어떤 무덤이 우리를 가두고 있습니까? 우리를 꼼짝 못하게 하는 어떤 죄나, 아니면 떨쳐낼 수 없는 다른 사람에 대한 원한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미래나 건강에 대한 걱정이 우리를 가두어서 삶이 어둡고 쓸쓸합니까? 아니면 죽음이 두렵습니까?예수님은 부활 생명을 믿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을 억매이고 있는 모든 인생의 짐들을 굴려 버려 주셔서 삶을 자유하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을 믿습니까? 그 생명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믿는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살 것입니다. 아멘.김요셉 목사가든그로브 복음루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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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박희민 목사 지상설교 “무엇이 보이느냐?” (1) 크리스천헤럴드2022.04.12
    설교를 제대로 준비하는 목사들이라면 설교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자세는 물론, 삶의 철학, 세계를 보는 시각과 가치관 등이 담기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존경받는 목회자들은 자신만의 명설교들을 가지고 있다. 새생명선교회 박희민 목사는 남가주 한인 기독교계에서 몇 안 되는 존경받는 원로 중 한 명이다. 박희민 목사는 1936년 충남 예산에서 출생했다. 에티오피아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1974년부터 남가주에서 목회했다. 1988년부터 나성영락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취임한 후 2004년 은퇴했다. 현재 새생명선교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편집자 주)  마가복음을 보면 다른 복음서에 없는 두 가지 독특한 치유의 기적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는 7장 31절 이하에 기록된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예수님이 고쳐준 사건이다. 또 다른 하나는 오늘 본문에 기록된 눈먼 사람을 고쳐준 기적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백성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고 말했다(이사야43장 8절). 예수님은 바로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듣게 하시고 보게 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음 말해주는 것이다.예수님께서 벳세다 지방에 가셨을 때 사람들이 한 맹인을 데리고 와서 고쳐주시기를 원했다. 예수님은 그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가서 눈에 침을 뱉으시고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셨다. 그때 사람이 나무가 걸어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이 다시 한 번 안수해서 그가 눈을 떠서 주님과 자신과 사람들을 바라보게 하셨다. 예수님은 말씀 한 마디로 병자를 고치시고 그의 눈을 뜨게 하실 수 있는 분이었다. 그런데 왜 두 번에 걸쳐 고쳐주셨는가? 마가가 이 기사를 기록한 것은 분명한 의도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시각장애자는 인간의 ‘실존’이다“사람은 무엇을 보느냐가?”가 중요하다. 그것이 우리 인생을 결정한다. 예례미야 1장 11절에도 하나님이 예례미야에게 네가 무엇을 보느냐? 질문하셨다. 그러자 예례미야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라고 대답했다. 살구나무를 히브리어로 쇠카드란 단어를 썼는데 동사가 될 때는 ‘지칸다’는 뜻이다. 살구나무를 추운 겨울에도 지켜주셔서 이른 봄에 그 가지에 하얀 새싹과 눈이 나오듯이 유대와 백성을 하나님이 지켜주시겠다는 환상을 보여 주신 것이다.1520년에 멜리건(Mallegan)이라는 사람이 남아메리카의 끝 티에라 델 퓨고(Tierra del Fuego)라는 곳에 도착했다. 그들은 큰 배를 타고 나타나는 자기들을 원주민들이 어떻게 대할까 많은 염려를 안고 육지에 다가갔다. 그런데 멜리건과 그의 선원들을 깜짝 놀라게 한 사실이 있었다. 그곳 원주민들의 눈에 전혀 띄지 않고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교묘히 원주민들의 눈을 피해서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왜 그들의 눈에 안 띄었을까? 원주민들의 눈에는 작은 카누(canoe)는 보이지만 큰 배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이 전혀 경험해 보지 않았던 큰 배는 그들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간단한 이야기지만 우리 인간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생각 안에 있는 것만을 보는 것이다. 나의 눈은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는데 사실은 보았던 것 아니면 상상 안에 있는 것들만 보고 살아가는 것이다. 소리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너무 작은 소리도 못 듣지만 너무 큰 소리도 못 듣고 산다. 사람은 자기가 보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한 것을 이루지 못한다. 흔히 이것을 비전이라고 부른다. 에스겔은 해골 골자기의 마른 뼈가 부활하는 환상을 보았다. 조각가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버려진 돌과 유리 조각을 통해 멋진 예술품을 바라보는 눈이 있다. 라이트형제는 하늘을 날으는 새를 바라보면서 하늘을 날으는 비행기에 대한 환상과 비전을 바라보았다. 디지니 월트는 너무 가난하여 창고에서 잠을 자는 어렵고 고생스런 생활에서도 낙심하고 좌절하기보다는 쥐들이 뛰어노는 것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어린이들을 기쁘고 즐겁할 수 있을까 하는 상상을 통해 디즈니 월드에 대한 비전을 만들어다. 미케란제로는 큰 바윗돌을 바라보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다윗의 조각을 머리 속에 상상했다. 듀츠라는 조각가는 질이 좋지않아 버려진 6미터 대리석을 주워다가 그것으로 불후의 작품을 만들어 세상에 남겼다.사람은 자기가 꿈꾸고 비전을 갖는 것만큼 큰 위대한 인물이 되는 것이다. 위대한 예술가나 과학자. 그리고 사업가들을 살펴보면 마음속에 먼저 어떤 비전을 보았던 사람들이다. 영적으로도 거성이 되려면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환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생각하고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고 노력해야 한다. 삼손은 불레셋 사람들에 의해 머리를 깎이고 눈이 뽑히는 비참한 고통과 실패 속에서 오히려 영안이 뜨여져 자신을 바로 바라보며 블레셋 무리들의 잔인함과 죄악상을 직시하면서 마지막 순간이지만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으며 영광 돌리는 최후를 맞았다.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는 문제다. 이것을 우리는 관점이라고 말한다. 같은 사건을 바라보지만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볼 수 있다. The attitude is  more important than fact라는 말이 있다. 같은 가나안땅을 정탐하고도 12명의 정탐꾼의 보고가 달랐다. 이것을 해석이라고 표현한다. 우리가 꼭 같은 사건을 바라보지만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마음과 눈으로 바라보고 주님의 마음과 사랑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속 중심을 보신다고 했다. 사람을 볼 때 현재만 보지 않고 그의 미래와 잠재력과 가능성을 바라 보는 것이다.그리고 우리가 바라보는 눈에는 육안, 지안, 영안이 있다. 세상에는 육신의 눈은 떴지만 지안이 어둡고 멀어서 지적 세계를 바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가 외국을 여행할 때 그 나라의 언어를 모르면 얼마나 답답하고 불편한지 모른다. 죽인다는 말인지 살린다는 말인지 몰라 답답하다. 그러나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이해하면 얼마나 세계가 넓어지고 재미있는지 모른다.한 걸음 더 나가 영안이 뜨여질 때 더욱 광활하고 넓은 진리의 세계가 펄쳐지고 놀라운 영적 세계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영적인 사람들은 세상사람들이 보지못하는 보이지 않는 넓고 깊고 높은 광활한 진리의 세계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한번은 한국장의사 화장실에 들어가 볼일을 보는데 어떤 분이 들어와 소변을 보고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불을 끄고 나갔다. 그때 얼마나 캄캄한지 지옥 같았다. 장의사집이 좀 음침하지 않은가? 그때 제가 깨달은 것은 눈을 떴어도 생명의 빛, 사랑의 빛, 진리의 빛 되신 그리스도가 없으면 지옥같은 캄캄한 세상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러한 빛이 있어도 또한 사람의 관심이 없으면 매일 다니고 수십 년 산 길 이름도 모르고 살아가게 된다. 20년 이상 지금 사는 집에 사는데 집 바로 윗 길목 이름을 모르고 지냈다. 사람은 자기와 상관이 없고 관심이 없으면 밤낮 그 옆을 지나도 길 이름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관심과 사랑이 있으면 길이 보이게 되고 길이름도 기억하게 된다. 좋은 것들이 보이게 된다. 상대방의 아름다움, 장점과 잠재럭이 보인다. 이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부른다. 아내가 다른 사람의 전화번호는 기억을 잘못하는데 아들의 전화번호와 손주들의 생일은 정확하게 기억한다. 관심과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아름다움이 있다. 놀라운 기억력과 잠재력이 있다. 그것을 발견치 못해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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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용서 크리스천헤럴드2022.04.12
    용서에 대해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 있다. 용서는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다. 용서를 시작한 후 용서가 완성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용서는 기독교의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다. 성경에는 용서하라는 말씀이 여러 군데 나온다. 예수님께서도 용서를 강조하셨고, 심지어 주기도문에서도 용서는 반복적으로 나온다. 크리스쳔 중에 용서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모든 죄를 용서받은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용서가 그만큼 크기 때문에 그 받은 용서의 은혜로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도 용서해야 한다.기독교 상담에서도 용서라는 주제가 종종 등장한다. 내담자들은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용서를 결단하고 그 용서를 지키고자 애를 쓴다. 하지만 분명히 용서했다고 해도 막상 어떤 상황이 되면 마음속에 분노가 여전히 끓고 있고 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 내가 당한 만큼 되갚아 주고 싶은 마음 등을 느끼곤 한다. 그러면, 이렇게 용서를 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 실망하고 용서 못함을 회개하거나 죄책감을 느낀다. 역설적이게도, 피해를 준 사람은 뉘우치지도 않고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데, 피해를 입은 분이 오히려 용서하지 못함으로 인해 더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기독교 상담자는 이런 상황에 대해 인지하고 있어야 하고, 내담자에게 ‘용서’가 중요한 주제로 떠오를 때 내담자를 잘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먼저 용서에 대해 신학적, 심리학적으로 잘 알고 있어야 하고, 가장 적절한 시기에 내담자가 용서를 잘 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용서란, 불공평하고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그런 잘못을 행한 사람에게 그 책임을 묻지 않고, 그 피해와 손해를 본인이 그냥 감당하기로 정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그보다 더 큰 용서를 주님께 받았기 때문이다. 용서의 뜻이 그렇기 때문에, 용서에 대한 조건을 제시하는 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용서라고 말하기 어렵다. 용서는 상대방(가해자)가 어떤 조건을 충족해야만 베풀어 주는 게 아니라, 전적으로 본인(피해자)이 결정하는 것이다.그런데, 한 가지 잘 구별해야 하는 것은, 용서는 과거에 벌어진 일에 대해 하는 것이지, 현재 진행 중인 일에 대해 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끝난 일에 대해 피해자가 선택하는 것이 용서이다. 현재 진행 중인 일은 용서의 대상이 아니라 문제 해결의 대상이다. 현재 부당하고 불공평하고 억울한 일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면 그 일을 멈출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지, 용서해야 하는 게 아니다.용서하기 위해 피해자는 자신에게 벌어졌던 일들, 자기가 억울하게 감수하게 된 피해와 손해 등을 먼저 분명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용서는 과거의 그 일을 그냥 묻어 두고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기가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 분명히 해야만 그것을 용서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자기에게 일어난 과거의 힘든 상황을 다시 떠올리는 것 자체가 피해자에게는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이 될 수 있다.많은 경우, 용서를 결심한 피해자는 결심한 그 순간에 용서가 완성되리라 기대한다. 그래서 다시 적개심이나 분노, 억울함 등이 마음속에 여전히 있는 것을 느끼면 실망하고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용서에 대해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 있다. 용서는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다. 용서를 시작한 후 용서가 완성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를 결심한 후 바로 용서가 완결되지 않아도 괜찮다. 용서를 하기로 결단했으면 그것으로 이미 용서는 시작이 된 것이다. 그것 만으로도 칭찬받을 만 하고 의미 있는 일이다.그럼 용서의 완성은 언제 이루어질까? 내담자가 용서를 시작한 후에 상담자와 내담자가 함께 집중해야 하는 것은 과거의 그 일로 인한 내담자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작업이다. 마음을 치유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상처의 경중에 따라 다양하다. 하지만, 마음의 아픔이 치유되고 상처가 아물면, 그 때 서서히 용서를 할 수 있는 힘이 차오른다. 즉, 용서의 완성은 본인이 이를 악물고 노력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마음의 치유가 진행됨에 따라 이루어진다. 용서는 나의 노력으로 ‘하는’게 아니라, 마음의 치유가 이루어지면 은혜로 ‘되는’ 것이다.지혜롭고 성숙한 기독교 상담자는 내담자에게 성급하게 용서를 하라고 강요하는 게 아니라, 내담자의 용서를 격려하되 시간이 걸리는 작업임을 알려주고, 내담자 마음의 아픔이 치유되는 과정을 잘 살피면서 적절한 타이밍에 용서를 완성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상담자다.송경화 교수월드미션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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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일생의 얼굴 크리스천헤럴드2022.04.12
     하나님은 나에게 일생이란 기간을 두고 어떻게 주님과 동행하며 사는지 지켜보실 것이다. 주님의 은혜와 용서가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보실 것이다뉴스를 보다보면 버퍼링으로 화면이 잠시 중단될 때 아나운서의 얼굴이 이상한 표정에서 멈춰있어 웃음을 자아내게 된다. 깔끔하게 차려입고 진지하게 뉴스를 전하는 앵커의 얼굴이 마치 코미디언의 얼굴처럼 정지된 모습은 우스꽝스럽다. 예쁘고 잘생긴 연예인들도 예외가 아니다. 우연히 잡힌 찰나의 얼굴은 대부분 웃기고 재미있다. 그래서 캡처된 사진이 짤로 인터넷에 돌아다니기도 한다.그러나 그 모습이 당사자의 평소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우연히 찍힌 모습일 뿐 평상시 얼굴과는 거리가 멀다. 그 사람의 수많은 얼굴 표정 중 하나일 뿐이다.그런데 우리는 어쩌다 보게 된 이 모습을 마치 그 사람의 본래 모습인 것처럼 생각하고 오해할 때가 있다. 잘 모를수록 내가 경험한 짧은 순간이 그 사람을 평가하는 전부가 되어 버린다. 편파적인 보도나 오보로 인해 고생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과 같다. 누구 말만 듣고 손가락질하고 돌을 드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이다. 내가 모르는 좋은 모습들이 많을 수도 있는데, 쉽게 단정짓고 평가하는 것은 공평하지도 정확하지도 않다.돌아보면 우리 모두 자랑스러운 모습도 있고 지우고 싶은, 부끄러운 모습도 있다. 어느 것 하나가 전체를 대신하지 않는다. 인생의 밑바닥에서 헤맬 때 나의 얼굴을 본 사람은 실패자를 보았을 것이고, 꿈을 이뤘을 때 나의 얼굴을 보았던 사람은 성공한 사람으로 기억할 것이다.하나님께 인정받은 다윗의 삶도 빛나는 성공에 반하는 어두운 그늘도 있었다. 살기 위해 적들 앞에서 미친 척했던 다윗의 얼굴을 본 사람에겐 그처럼 비겁한 모습이 없었을 테고, 두려워하지 않고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의 얼굴을 본 사람에게는 그와 같이 용맹스러운 모습이 없었을 것이다. 언제, 어떤 모습을 보았느냐에 따라서 평가는 달라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에 대한 평가를 내리기 전에 최대한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2021년에 세계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는 사진가 그룹 매그넘의 사진 작가들이 한국 다도해를 다녀갔다.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이 된 다도해 갯벌과 그곳의 생명을 사진에 담기 위해서이다. 세계적인 사진 작가들이 앞으로 5년간 돌아가며 다도해를 찾을 예정이다. 영화를 찍는 것도 아니고 무슨 사진을 찍는데 5년이나 걸리냐며 의아해 할 수 있지만, 이유를 들어보면 이해가 된다. 마을의 겉모습을 담는 것이 목적이라면 사물과 풍경을 담은 사진으로 충분하겠지만, 그 마을의 주민들이 갯벌과 함께 살아온 삶을 담기 위해서는 사진에 들어갈 사람과 지역과 갯벌을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5년이란 기간을 정하고 작가들이 지속적으로 마을을 찾아 그곳을 알아가겠다는 것이다. 토양과 생명체와 그것이 주민들의 삶에 미친 영향을 연구하겠다고 한다. 답사를 온 한 매그넘 사진작가는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민들을 비롯해 마을에서는 갯벌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흥미가 있습니다. 제가 앞으로 지낼 며칠간 반드시 배워야 하겠죠.” 깊은 이해 없이 누른 셔터로는 삶을 담는 사진을 찍을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시선도 이와 같다. 하나님은 나에게 일생이란 기간을 두고 어떻게 주님과 동행하며 사는지 지켜보실 것이다. 주님의 은혜와 용서가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보실 것이다. 공평하신 하나님은 내가 사는 환경과, 겪는 일들 모두를 보시고 평가하실 것이다. 사람도 정확한 사진을 찍기 위해 5년이 걸린다는데, 하물며 일생 동안 우리를 지켜보실 하나님의 평가는 얼마나 더 정확하고 공정하겠는가.그러니 섣부른 사람의 평가에 너무 휘둘리지 말고, 상처받지 말아야 한다. 그보다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나를 평가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그러니 소신껏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내가 사는 동안 수많은 크고 작은 실수를 딛고 일어나 만회할 수 있도록 일생 동안 기회를 주신다. 그 모든 평가는 최후의 날에 하실 것이다.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10)조영석 목사찬양사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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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우리가 알아야 할 것 크리스천헤럴드2022.04.12
     카카오톡 아이디 kimbg1212로 연결하시면 매일 카톡으로 말씀을 묵상할 수 있는 큐티자료를 보내 드립니다.바울은 이스라엘 선조들의 출애굽과 광야 생활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홍해를 건너게 되었고 광야 생활 가운데 하늘에서 내려 주시는 만나와 신령한 반석에서 나온 물을 마셨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뻐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았지만, 광야에서 죽게 되었고 그 시체가 여기저기에 흩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일들은 우리에게 거울이 되고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경계로 기록하였다고 말합니다. ‘거울’이라는 말은 ‘타격을 가한 흔적’이라는 뜻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에 지워지지 않을 하나의 흔적으로 새겨 놓으라는 강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악한 일을 즐겨 행했기 때문에 멸망 받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광야 생활 가운데 우상숭배, 음행, 불평과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죽임을 당하였다고 말하면서 종말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런 악을 행하면 우리도 멸망 당할 수 있다는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주어진 시간 안에서 보편적으로 성공, 행복, 사랑이라는 목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우리는 종말론적인 시간(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소망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교린도 교회에 성도들에게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말합니다. 선줄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복음에 대한 지식과 생활에 흠이 없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넘어진다는 것은 실패하여 멸망할 수도 있다는 것 입니다.기독교인들은 생명의 길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이 언제든지 다시 오실수 있다는 종말론적인 영적인 긴장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왜냐하면 우리는 일상의 삶 가운데 시험에 들기도 하고 시련이 늘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날마다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삼키려고 합니다. 롯의 처를 생각해 보면 됩니다. 따라서 영적으로 깨어 있어 멸망 할 수도 있다는 긴장감을 유지하고 주님을 바라보고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주시기 때문에 그 어떤 시험도 이길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긴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자녀답게 멋있는 믿음의 삶을 살아내어 하나님 나라에서 잘했다 칭찬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멘김요셉 목사가든그로브 복음루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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