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신춘식 교수와 함께 하는 조나단 에드워즈 선교신학 <디아스포라는 선교의 최전선이다>
크리스천헤럴드2026.10.04
미주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 안에는 오래된 자기 질문이 있다. “우리는 복음을 받은 민족이었는데, 이제 우리가 선교를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방 땅에서 살아남기도 바쁜데, 선교는 여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가.” 이 질문은 겸손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선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선교는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주는 것이 아니다. 선교는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통해 세상 안으로 들어가시는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의 선교신학 중심에는 Missio Dei, 곧 ‘하나님의 선교’ 개념이 자리하고 있다. 이 개념은 선교의 주체가 교회나 선교사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자신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기를 원하셨고, 그 목적을 향해 역사 전체를 이끌어 오셨다. 교회와 성도는 그 하나님의 선교에 초대된 참여자들이다. 그리고 에드워즈의 통찰은 여기서 더 나아간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서 있는 바로 그 자리를 선교의 현장으로 삼으신다. 에드워즈가 Missio Dei 를 이해한 방식은 그의 역사신학과 깊이 연결된다. 그는 『구속 사역의 역사』(A History of the Work of RedempFon)에서 창조부터 종말까지의 역사를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하나의 거대한 선교 이야기로 해석했다. 이 이야기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언제나 경계선 위에 서 있었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 낯선 땅으로 보내졌고,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바벨론에서 이방인으로 살았으며, 초대 교회는 예루살렘에서 땅끝까지 흩어졌다. 디아스포라는 하나님의 선교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략이었다. 에드워즈는 이 흩어짐을 결코 우연으로 보지 않았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열방 가운데 흩으심으로써 복음이 전달될 통로를 만드신다. 흩어진 자들이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때, 그것이 곧 선교이다. 화려한 집회도, 특별한 프로그램도, 전문적인 훈련도 먼저가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삶 자체가 이미 Missio Dei 에 참여하는 행위라는 것, 이것이 에드워즈 선교신학의 핵심 통찰이다. 이 통찰은 에드워즈 자신의 삶에서 검증되었다. 그가 스톡브리지의 인디언 선교지로 내려갔을 때, 그것은 인간적으로 보면 좌천이었다. 당대 최고의 신학자가 변방의 작은 공동체를 섬기는 것은 세상의 기준으로는 자원 낭비처럼 보였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스톡브리지를 자신이 내려간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곳으로 받아들였다. 그 자리에서 그는 인디언 아이들을 가르치고, 부족 장로들과 대화하고,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동시에 인류 역사에 남을 신학 저작들을 남겼다. 삶의 자리가 선교의 자리였고, 선교의 자리가 신학의 자리였다. 오늘 미주 한인 디아스포라의 삶의 자리를 이 렌즈로 다시 보자. 우리가 일하는 직장은 단순한 생계의 현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가 펼쳐지는 공간이다. 우리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는 다음 세대 선교사들이 훈련받는 곳이다. 우리가 사는 동네의 이웃들 즉 히스패닉 가정, 아시아계 이민자, 미국인 동료는 하나님이 우리 곁에 두신 선교의 대상이다. 디아스포라의 삶의 자리 자체가 이미 선교의 최전선이다. 에드워즈는 선교를 두 가지 차원에서 이해했다. 하나는 선포의 선교(ProclamaFon)이고, 다른 하나는 삶의 선교(Presence)이다. 그는 두 번째 차원을 특별히 강조했다.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맛본 사람은 그 아름다움이 삶 전체에서 흘러나온다. 억지로 전도 문구를 외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충만한 삶이 자연스럽게 이웃에게 빛이 된다. 이것이 에드워즈가 말한 선교의 가장 근본적인 형태였다. 디아스포라의 일상이 곧 선교의 언어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가진 독특한 선교적 강점이 드러난다. 우리는 이미 두 세계를 살고 있다. 한국의 언어와 문화, 미국의 사고방식과 네트워크를 동시에 품고 있다. 이 이중성은 때로 정체성의 혼란을 일으키지만, 선교의 관점에서 보면 누구도 쉽게 가질 수 없는 특권이다. 우리는 동양과 서양, 이민자 공동체와 주류 사회, 한인 교회와 다민족 교회 사이의 다리가 될 수 있다. 에드워즈의 Missio Dei 신학으로 보면, 이 위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교적 소명의 자리이다. 디아스포라 교회가 이 선교적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는 살아남아야 하는 소수 공동체’라는 생존의 언어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선교 공동체’라는 소명의 언어로 옮겨가야 한다. 이 전환은 단지 말의 변화가 아니라 존재 방식의 변화이다. 교회가 모이는 것은 흩어지기 위해서이고, 예배는 세상을 향한 파송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것이 에드워즈가 말한 교회의 본질이었다. 이 소명을 실천하는 방식은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직장에서 정직하게 일하고, 이웃에게 친절을 베풀고, 어려운 이민자를 돕고, 지역 사회의 필요에 응답하는 것, 이 모든 일상의 행위가 Missio Dei 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에드워즈가 스톡브리지에서 인디언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부족의 권리를 위해 목소리를 높인 것처럼, 우리의 작은 행동들이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방식이 된다. 에드워즈는 Missio Dei 가 완성되는 날을 꿈꾸었다. 그의 종말론적 비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한 날, 모든 민족이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이 반드시 온다. 그 날을 향해 역사는 흘러가고 있다.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그 역사의 흐름 안에서 열방이 하나로 모이는 예표(豫表)가 될 수 있다. 한국인과 미국인, 히스패닉과 아시아인이 함께 예배하는 디아스포라 교회는 이미 그 종말론적 비전의 작은 선취(先取)이다. 선교는 멀리 가는 것만이 아니다. 선교는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신 바로 이 자리에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노샘프턴에서, 스톡브리지에서, 그리고 프린스턴에서 그것을 살아냈다. 그 자리들이 각각 그에게는 선교의 최전선이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 즉 로스앤젤레스의 식당, 뉴욕의 병원, 달라스의 교실, 시카고의 사무실이 우리의 선교 최전선이다. 미주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가 에드워즈의 Missio Dei 신학을 붙든다면, 우리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질 뿐 아니라 이 땅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진다. 미국은 우리가 잠시 머무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신 선교지이다. 한인 교회는 한인만을 위한 공동체가 아니라 열방을 품는 선교적 공동체이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은 생존의 기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 이야기의 한 페이지이다. 하나님의 선교는 멈추지 않는다. 그 선교는 아브라함의 이주에서 시작하여 초대 교회의 흩어짐을 거쳐, 오늘 미주 한인 디아스포라의 삶의 자리까지 흘러왔다. 에드워즈의 Missio Dei 신학은 우리에게 말한다. 당신이 서 있는 그 자리가 선교의 최전선이다. 그 자리를 떠나지 말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라. 그것이 바로 디아스포라로 부름받은 우리의 소명이다. 디아스포라는 실패한 이민이 아니라 하나님이 설계하신 선교 전략이다.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가 이미 선교의 최전선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선교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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